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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저것은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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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1-02 16:58 조회30,5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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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선 결과를 두고 여러 해석들이 나오는 가운데 세대 간 갈등에 주목하는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결국 세대별 투표율 차이가 승패를 가름했기 때문이다. 젊은 층의 참여도 높아졌지만, 50, 60대의 경이적인 투표율 상승이 박빙의 국면을 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젊은 세대의 꿈이 늙은 세대의 손에 깨지는 것을 보고 착잡한 심경에 빠진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노인세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 표출에서부터 고령화에 따른 사회의 보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년의 자기주장이 이처럼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한 사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나이든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주변으로 물러나는 것, 생명의 현장에서 소외되는 일이기 쉽다. 일찍이 아일랜드의 국민시인 예이츠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 쓴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서로 껴안은 젊은이들”을 보며 “저것은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시인은 이들이 ‘관능의 음악’에 취해 ‘영원한 지성의 기념비’를 무시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나이 들어 육신이 아름다움을 잃고 허물어질 때, 노년의 의미는 정신의 지고한 가치를 좇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시의 화자로 하여금 젊은 몸을 지닌 존재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떠나 영원히 늙지 않는 예술의 도시 비잔티움으로 향하게 한다.

그렇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생명의 축제에서 밀려난 노년의 짙은 비애와 생동하는 청춘에의 열망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연어 치솟는 폭포, 고등어 우글거리는 바다”라는 활기 넘치는 표현에서 엿보게 된다.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내세우면서도 젊음의 생기를 은밀히 그리워한 예이츠와는 달리 더 직설적으로 죽는 순간까지 생명의 끈을 붙잡아야 한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다. 웨일스의 시인 딜런 토머스는 노인들은 다가오는 죽음에 맞서 항의하고 분노해야 한다고 외쳤다. 병석의 부친에게 ‘꺼져가는 빛’에 순순히 승복하지 말고 끝까지 맞서라는 그의 호소에는, 세상에서 물러나 소멸의 운명을 앞둔 노년의 삶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투표장에 길게 늘어선 나이든 주권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심지어 노환으로 입원한 환자들이 앞다투어 투표하겠다고 나서서 간호사들을 난처하게 했다는 소문도 들으면서, 딜런 토머스의 호소를 떠올린 것은 왜일까? 저물어가는 삶 속에서, 생명의 빛이 차츰 꺼져가는 가운데 자기존재를 내세우고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노인들에게 허용된 것이 다만 한 장의 투표권이라면? ‘저 좋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려 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지향이 그 정치적 행위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노년들로 하여금 바다 건너 비잔티움이 아니라 투표장으로 향하게 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병약해지면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의자를 넘겨주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다. 이번 대선 결과가 세대 간의 갈등과 적대감을 부추길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보편의 진실이 세대 사이를 통합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는 노년들의 자기주장을 폄하하지 말아야 하고, 나이든 세대는 미래를 살아갈 젊음의 꿈을 장려해주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생명권은 소중하고 지켜져야 하지만 꺼져가는 빛 속에서 삶의 지혜를 깨달아가는 것도 노년의 힘일 것이다.

고령화로 인한 사회의 보수화를 우려하는 데서 나아가 이제 진보에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조차 피력되고 있다. 그렇지만 고령사회가 현실로 다가오는 시대에 노년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고 노년에 대한 상투화된 의식을 극복해내는 것도 우리 사회의 과제가 아닌가 한다. 노년이 초라하고 괴롭지 않도록 사회적인 배려가 더 있어야 하고, 일을 통해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도 더 주어져야 한다. 나이 듦이 저주가 아닌 그런 사회를 이룩해나가는 가운데 노년의 자기주장이 젊은 세대의 선택을 가로막는 아이러니도 되풀이되지 않을 법하다.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
(201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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