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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추석, 강남스타일로 놀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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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02 15:24 조회30,4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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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귀향이 시작되었다. 필자도 토요일에는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위에서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지칠 만하면 요즘 세계적 선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흥얼거리면서. 명절이면 되풀이되는 귀성전쟁을 겪다보면 이 난리법석이 언제 끝나나 하다가도 여기저기 흩어진 혈육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 회동이 명절이라는 동원력이 없으면 언제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가족친지가 만난다는 의미도 있지만, 서울과 지방, 도시와 농촌사람들이 섞이고, 세대 사이의 만남이 대규모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추석은 정치적으로도 큰 의미를 띠게 되었다. 특히 대선을 앞둔 올해 ‘추석민심’이 정치권의 주된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런데 추석명절의 사회학이든 정치학이든 이 회동의 의미를 말할 때 빼놓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이 귀향이 남성중심의 질서를 확인하는 행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가족재회는 남자쪽 집안에 우선권이 있고 여자쪽은 차후로 밀리기 마련이다. 여성은 명절에 자신의 부모형제를 만나기는커녕 각자의 시댁에서 음식장만과 설거지 및 갖은 뒤치다꺼리를 담당하게 된다. 대부분의 집안에서 겪는 일이겠지만, 필자의 경우에도 여기서 생겨나는 부작용을 해소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결혼 초 한때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명절문화 혁신을 외치며 어머니와 며느리들이 일하는 부엌으로 진입했다가 결국 어머니의 밀어내기에 마지못한 척 물러났고, 설거지를 하자 해도 아주버님 우리가 할게요 하는 제수씨들을 쉽게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차츰 혁신 의지도 옅어지고 내 실패를 워낙 완강한 가부장질서 탓으로 돌리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친족들이 다 모이는 문중제사에 참여하게 되면 그 엄숙한 집단의례 앞에 무슨 혁신을 꺼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기득권 질서에 안주하게 된 필자를 삐딱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눈이 있으니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뭘 좀 아는” 개념 있는 놈임을 자처하는 싸이의 ‘오빠’는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스타일이지? 가부장 스타일인가? 라고 묻는 것이다. 필자는 싸이의 이번 성공이 대중문화에서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현상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기성질서에 대한 풍자와 질문, 가식과 세련에 대한 뒤집기, 전통적인 흥과 해학이 녹아 있다. 강남으로 대변되는 기득권과 엘리트의식을 뒤집어 투박하지만 개념 있는 내가 진짜 강남스타일임을 내세우는 유쾌한 반전.


이번 추석모임에서 조카들의 말춤을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리 세대도 서울에서 내려간 개념 있는 강남스타일의 남자가 되는 반전을 꿈꾸어보면 어떨까? “전 부치는 정도야 우리도 하지, 이리 좀 줘봐!” “설거지는 우리에게 맡기고 여자들은 빠져요, 고스톱도 좋고!” 어머니가 기겁하고 밀어내면 “왜 이러세요, 저리 가서 손주한테 말춤이나 배우시지요.”


하긴 미국 공화당의 롬니 후보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도 말춤을 추고 나섰다니, 그리 신선한 제안은 못될 듯도 하다. 그렇지만 필자가 명절마다 내려가는 곳은 보수의 텃밭인 영남권이다. 문중제사가 있는 자리에선 요즘 정치를 논하는 형님들 사이에서 되도록 다소곳이 있는 편이 신상에 이로운 동네다. 세칭 TK 출신인 필자가 고교동창회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싸이의 삐딱한 시선을 느끼는 순간, 이 묻지마 식 지역주의를 한번 흔들어봐? 하는 속살거림이 들려온다. “있잖습니까, 사과는 사과고 거 대법원 판결이 둘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건 좀 그렇잖아요? 기본이 안 돼 있는데….” 이렇게 ‘우리가 남이가’의 담장을 쿵 한번 치는 것이다. 경험상으로는 이러면 대개 분위기가 좀 싸늘해지는데, 뭐 어떤가? 추석 교통체증의 짜증을 달래려고 싸이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려온 덕분에 뭔가 반전 있는 남자가 되고 싶은 ‘오빤 강남스타일’ 신드롬의 희생물이 되어 있으니.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싸나히! 그런 싸나히!”라면서.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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