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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권력의지와 사명에 대해: 박근혜, 문재인 그리고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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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08 16:49 조회23,3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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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쓰이지만 불명료한 개념이 있다. 권력의지도 그런 개념이다. 이 말을 자주 쓰는 사람은 니체 강의를 맡은 대학 교수들을 빼고 나면 정치부 기자들이 대부분인 듯싶다. 그들은 정치인을 평가할 때, 이 말을 쓰기를 좋아하는데, 그들의 어법으로부터 추리하면 대개 이런 뜻이다. 특정 공직에 대한 강렬한 욕망, 그 공직이 요구하는 능력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 자신의 욕망을 지지자와 대중의 열망으로 환치하는 자기중심성 내지 자기도취성, 그렇게 설정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불법의 아슬아슬한 경계까지도 돌진하는 추진력.

그런데 마지막 것은 의지라는 말과 어느정도 어울리지만, 앞의 것들은 나르시시즘적 성격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며, 마지막 것조차 나르시시즘이 충분히 강한 경우 그것으로부터 발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지라는 말의 통상적 의미는 정치인에게 적합한 성격은 강한 추진력을 가진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거기엔 어떤 통찰이 깃들어 있긴 하다. 자기 행동의 규범과 기준을 스스로 세움으로써 타자의 반응으로부터 일정한 독립성을 형성하는 경우 우리는 그를 자율적인 존재라고 본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적인 사람은 타자의 행동과 반응에서 독립적이긴 해도 자율적인 존재는 아니다. 자율적인 존재는 타자의 행동과 반응을 모니터한다. 그리고 여러 반응들이 자신의 행동 규범의 수정을 일관되게 요구할 경우 그것에 성찰적으로 대응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적 존재는 자신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반응만 수용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거부한다. 그에게 타자는 추종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될 뿐이다.

친구로서는 도무지 달갑지 않은 이런 성격이 정치인으로 살아가는 데는 두가지 점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하나는 정치의 세계가 적대와 투쟁의 세계여서 타인에 대한 공격과 비방이 난무하는 곳이라는 점과 관련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에 대한 예민함을 덜어내는 것이 필요한 면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어떤 사람이 가진 능력을 잘 실현하게 해주는 것은 자신에 대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평가가 아니라 약간의 과대망상이다. 그리고 적대적인 정보와 비방이 넘치는 정치세계에서 추진력을 가지고 성공을 이룩하기 위해서 자신에 대한 약간 이상의 과대망상이 필요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나르시시즘이야말로 타자의 사랑을 이끌어내기 좋은 성격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즘을 가졌고 어떤 순간 그것을 상실하거나 상처를 입은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진 존재를 보게 될 때 낙원 상실 이전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에게 매혹된다. 청중을 감동시키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청중을 감동시키려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노래에 완전히 몰입하고 스스로에게 감동하고 있는 가수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 마치 이면처럼 붙어 있는 불리한 점들도 있다. 우선 나르시시즘은 그것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지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의지는 정치인의 일반적 특징만을 말해줄 뿐, 그가 어떤 정치인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인은 공직을 추구하긴 해도 그 공직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할지 그 자신조차 모르는 경우가 제법 있다. 많은 정치인들이 ‘철새’처럼 행동하거나 구사대처럼 의회 난상을 점거하려 돌진하는 것은 이 때문인데, 그것은 그들이 너무 계산적이라서가 아니라 계산을 가능하게 할 일관성을 결여해서라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약점은 나르시시즘 또한 궁극적으로는 타자의 반응으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는 점과 관련된다. 앞서 나르시시즘은 자율성과 달리 타자의 반응을 절연한다고 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타자에 의존하기 때문에 외적 확인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나르시시즘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어떤 뚱뚱한 여자를 생각해보자. 자율적일 경우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뚱뚱하다는 코멘트가 반복되면, 자신의 신체 상태를 점검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체질,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 그리고 다이어트가 성공적일 수 있는 수준을 견주어볼 것이다. 동시에 문화적 평판과 그것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타자들(significant others)의 태도가 적합한지 병리적인지 판단해보고, 일정한 타협선을 찾아 자신의 몸매를 조정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르시시즘적이라면, 그녀는 세평을 무시하고 자신이 날씬하다는 환상을 탐닉할 것이다. 그리고 이 환상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을 언제나 예쁘고 귀엽게 바라본다고 가정된 중요한 타자(예컨대 아버지)의 시선일 것이다. 그런 경우 어떤 이유로 중요한 타자의 시선이 깨지면 나르시시즘도 모래처럼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정치인의 경우에는 나르시시즘을 붕괴시키는 계기들이 주기적으로 다가온다. 선거에서의 실패와 공직의 상실이 그런 예이다. 그런 경우에도 한 줌의 추종자들만으로 나르시시즘을 유지할 수 있지만 때로 그 추종자들조차 사라질 수 있다. 그런 경우 나르시시즘은 남김없이 파괴된다. 가장 나쁜 경우는 이런 약점에 앞서 지적한 약점이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나르시시즘을 파괴하는 실패의 순간 더 두드러지게 방향 상실을 겪고 그로 인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은 정치인으로서의 적합성의 이유인 동시에 부적합성의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양면성 때문에 나르시시즘이 정치인이 실패나 성공 어느 쪽을 예정한다고 말할 수 없다. 행운의 도움이 있고 역경을 돌파할 재능이 결합된다면 그는 성공적인 정치인이 될 수 있다. 기억할 만한 예로 우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성찰적으로 전유될 수도 있다. 최근에 정봉주 전의원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공공연히 그리고 조금은 과장된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 나르시시즘을 자의식적으로 이해하고 바로 자신의 그러함을 상연할 수 있었다는데, 그런 능력이 나르시시즘이 자칫하면 야기할 수 있는 불쾌감을 없애고 향긋함을 더해주는 향신료로 작용했다. 


나르시시즘처럼 강한 추진력을 가지지만 나르시시즘과 달리 정치적 지향과 이념이 내장되어 있는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이점과 관련해 흔히 말해지는 것이 사명이다. 정치인은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명이란 무엇일까? 사명은 그것을 받아들인 자가 완수해야 할 무엇이며, 주체는 그것과 관련해서 존재 의의를 갖는 무엇이다. 요컨대 사명을 가진 주체는 사명을 잃을 때 자신도 잃으며 그런 점에서 주체는 사명과 구분되지 않는다.

권력의지를 심리적 범주로 옮겨본 것처럼 사명이라는 말도 그렇게 해본다면, 사명은 상처 또는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다. 심리적 상처를 입은 사람은 상처를 야기한 사건을 심리적으로 반복한다. 이 반복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주체는 트라우마의 의미를 해독하려 한다. 주체는 트라우마의 해소를 지향하지만, 표준적인 정신분석적 해석과 달리 그것은 주체가 더 깊게 트라우마에 연루된 존재가 되는 과정이며,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고유성을 길어올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우리 자신됨은 상처의 자신됨이랄 수 있다. 생각해보라, 나란 무엇인가? 사회적 역할이나 분류에서 벗어난 나의 고유함이란 내 자신이 겪은 상처와의 동일시 속에 있다. 주체란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떠맡는’ 역설적 몸짓 속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전혀 나르시시즘적인 정치인이 아닌 듯이 보인다. 이 말이 그들에게 평균적인 나르시시즘, 그러니까 아침에 세수를 할 때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될 때 싱긋 자신에게 미소를 보내는 나르시시즘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출발점에는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에서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그들의 정치적 추동력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의 죽음이라고는 하지만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측근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적에 의해 자살로 내몰렸다. 죽음의 효과도 달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었을 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해방감을 느꼈다(이 해방이 그의 후계자가 된 전두환에 의해 짧게 끝났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과 회한을 남겼다. 박근혜와 문재인이 죽은 대통령들과 각각 맺은 관계도 성격이 다르다. 박 후보에게는 아버지였던 대통령의 죽음이었고 문 후보에게는 형 같고 친구 같았던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트라우마는 주체에게는 암호가 된 메시지랄 수 있다. 트라우마를 떠맡는 정치란 결국은 승화, 그러니까 암호를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메시지로 해독하는 작업이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차이점이 사명의 승화 가능성에 일정한 차이를 낳는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모욕당하며 죽은 대통령의 상징적 구원이라는 과제를 사명으로 떠맡지만, 육친의 무게는 형 ‘같고’ 친구 ‘같았던’ 존재의 무게보다 더 막대하다. 그 무게의 육중함은 주체의 심리적 해방을 영원히 저지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삶이 대한민국 사람 절반 이상에게는 용납될 수 없고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므로 박근혜 후보의 대선 도전이란 트라우마의 승화이기보다 우리 사회에 일종의 정신적 내전을 도입하는 행위가 될 위험이 크다.

이 글을 쓰는 중에 그녀는 대통령 후보로서 과거 아버지의 통치에 대해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것이 승화의 단초일까? 아닐 것이다. 그녀가 대변인으로 임명할 예정이었던 김재원 의원은 박 후보의 과거사 사과 하루 전 기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박근혜 후보가 정치를 하는 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베드로가 예수를 배반한 것처럼 (내일 기자회견에서) 박 후보가 아버지를 부정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뒷부분의 말은 너무 많은 진실을 누설하고 있다. 왜냐하면 베드로라는 은유를 따라가면 박 후보는 지금 베드로처럼 아버지를 배반하지만 끝내는 아버지를 위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점에서도 승화의 단초가 아님을 말할 수 있다. 박 후보는 아버지의 통치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통치를 옹호했던 자신의 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았다. 성폭력 사건에 비유하면, 아버지의 통치는 일차 가해이지만, 아버지를 옹호한 박 후보의 발언은 이차 가해에 속한다. 그녀는 무엇이 가해인지, 가해는 어떻게 발생하는 것인지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며, 유력 대선 주자가 법원의 재심 판결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위험하고 당사자들에게 위협적인지에 대해 모르고 있거나 그 점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문재인 후보는 박근혜 후보보다는 더 적은 무게를 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양가감정도 그의 슬픈 죽음을 계기로 많이 해소되었다. 따라서 그는 박근혜 후보와 달리 정신적 내전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사코 정치의 길을 회피했던 그로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깊은 상처가 되기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막을 수 없는 운명을 덮어쓴 박 후보와 달리 더 일찍 한 운명(정치의 길)을 수용했다면 다른 한 운명(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오의 무게를 지기 때문이다. 막지 못한 운명이 단순한 선택일 수 있었던 것에 운명의 무게를 부여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운명이다…”라는 말로 문재인의 운명을 주조했지만, 그는 그런 트라우마를 승화할 길 또한 열어주었다. “새시대의 맏형이 되려 했지만 구시대의 막내가 되고 말았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한이 그에게 방향을 주기 때문이다. 문재인 후보는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그날 조금도 길을 벗어나지 않고 곧장 “새시대의 맏형이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말은 그가 상복을 벗을 것을 요청한다. 그가 상속자이기를 그칠 것을 요구한다. 노무현 정부뿐 아니라 김대중 정부를 포함한 민주정부 10년의 공과를 분별하고 그것을 성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를 수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노무현을 위한 복수를 넘어서는 길이기도 하고, 노무현조차 밟고 그 너머로 가는, 노무현이 앙망한 길이기도 하다.

대중은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지로 앞에 놓인 사람들이 모두 상주이고 그들이 걸머진 사명이 유령들을 불러들여 선거가 진혼제가 되는 상태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보기에 박근혜 후보는 종래 상복을 벗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는 승화의 실마리를 간직한 트라우마라는 행운 속에 있다. 그가 자신의 행운을 우리의 행운으로 만들어 돌려줄지 지켜볼 일이다. 

이렇게 무거운 사명들 사이에서 안철수 후보는 어떤 사명을 지고 서 있는 것일까? 그에게 사명이 있기는 한 것인가? 앞서 말해온 논리를 따른다면 그에게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 것일까? 트라우마가 있기나 한 것인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죽음의 트라우마가 아니라 사랑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해”하고 말하면 남자는 “나도”라고 답한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면 여자는 “왜?”라고 되묻는다. 여자의 이 물음은 남자를 당황하게 한다. 왜냐하면 사랑에 깃든 심연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더불어 남자는 왜 “나도”라고 답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그 심연의 낌새를 느끼고 그것을 서둘러 외면하려 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내부로부터 그저 솟아오르며 그렇게 자명하다. 하지만 사랑받는다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심연을 열어젖힌다. 만일 당신이 사랑받는 체험 속에서 두려움과 당혹을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안온하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르시시즘적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사랑이 당신의 당신 자신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는 역할을 해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사랑은 방어막을 찟고 우리 내부로 파고든다. 그것은 일종의 트라우마이며, 그렇기 때문에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 커다란 사랑, 깊은 사랑, 열렬한 사랑일수록 우리는 되묻게 된다. “그는 왜 나를 사랑하는가? 나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경험적인 존재인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랑의 초월성에 우리는 당황한다. 어쩌면 나조차 모르는 내 무엇, 나보다 더 나인, 내 안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뚜벅뚜벅 다가오는 타자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사랑으로부터 우리는 도망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가 나의 도피와 나의 거절을 다시 껴안아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사랑으로 그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을 뿐이다. 

안철수 후보가 지난 서울시장 보궐 선거 이후에 직면한 것은 바로 이런 불가해한 사랑이다. 그는 모르는 여인으로부터 수천통 수만통의 편지를 받았던 것이다.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자신이 했던 일들, 살아왔던 삶의 여러 작은 순간들…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의 개발, 기부, 청춘 콘서트, 그 모든 삶의 흔적과 궤적에 비해 너무나 비대칭적인 다수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이 비대칭성이 그 사랑을 암호로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그는 자신에게 타전되는 희미한 메시지, 어쩌면 열렬한 구조 신호일지도 모를 메시지를 해독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메시지를 수신했다. 그는 여전히 대중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어떤 투사의 대상임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는 출마 선언의 슬로건도 “국민이 선택한”이 아니라 “국민이 선택하는” 미래가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짊어짐이고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본 이들은 안다.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받기를 열망하지만, 그는 그저 사랑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받으려 한다. 사랑에 응답하는 자가 그마저 알고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이 어긋남의 가능성,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2012년 겨울을 향한 사명의 시간 속에 우리는 있다. 권력의지보다 더 강한 것들의 시간을 경유하고 있다. 얼룩과 상처와 격렬한 사랑, 투쟁의 시간이다. 산 자들은 물론이고 죽은 자들조차 안전하지 않은…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창비 문학 블로그 '창문' 201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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