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잠들지 않는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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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22 14:49 조회21,92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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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나는 김하기라는 신인작가의 단편소설 <살아있는 무덤>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모르는 현실의 이면이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알았지만, 김하기는 부산대 학생으로 부마항쟁에 참가하여 구속된 적이 있었고 그 뒤에는 부림사건으로 여러 해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젊은 문학도였다. 부림사건은 평범한 변호사 노무현을 열렬한 인권운동가로 거듭나게 만든 바로 그 사건이다. <살아있는 무덤>은 작가가 옥중에서 목격한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의 참상을 증언한 내용이었다.
나는 물론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형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기수들이 1973년경 감옥 안에서 국가권력의 사주에 의해 그처럼 잔혹하게 고문과 폭력을 당하고 있을 줄은 짐작도 못했다. 0.7평의 좁은 감방은 소설 제목 그대로 ‘살아있는 무덤’이었다. 이른바 전향공작으로 불려진 그 폭력 아래 여러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자살했다. 그야말로 악마의 체험이었다. 하지만 소설 <살아있는 무덤>의 감동은 폭력의 고발 자체에 있다기보다 폭력에 굴복하기를 끝내 거부하는 인간의 강인한 내재적 존엄성을 보여준 데 있었다.
이 소설이 오늘 다시 내 주의를 끄는 것은 그 끔찍한 국가폭력이 왜 하필 그 시점에 발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알다시피 1972년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두 사건으로 기록되는 해이다. 다름 아니고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와 이른바 ‘10월 유신’의 강행이다. 조금 시야를 넓히면 그 무렵은 실로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닉슨의 베이징 방문으로 상징되는 미국과 중국의 접근인데, 그 배경에는 중-소 분쟁과 베트남전쟁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수십년 지구를 얼어붙게 했던 냉전체제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박정희 정부의 7·4공동성명 채택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그 나름의 합리적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은 민족사의 커다란 전진으로 평가될 이 성명의 발표가 일종의 사기극일지 모른다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7·4남북공동성명에 뒤이은 ‘10월 유신’의 폭거 때문이다. 물론 박 정권은 유신쿠데타를 강행하면서 그것이 마치 통일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조치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홍석률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부는 유신 선포 날짜를 10월14일에 결정하고, 이 사실을 10월16일, 즉 계엄 선포 하루 전에 북쪽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이틀 뒤인 10월18일 남쪽 관리는 다시 북쪽 상대역을 만나 “외세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통일을 하려 하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정치개혁을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다.(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275쪽)
어느 나라 정부든 중대한 결단을 앞두고 이를 관계국가에 귀띔하는 것이 상례다. 한 시간 전에 하느냐 하루 전에 하느냐를 정하는 것은 사안의 성격과 국가 간 관계의 밀접도에 따를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역사에서 남쪽 정부가 북쪽 정부에 이처럼 친절하게 사태를 통보한 예는 아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섣부른 추론이지만, ‘10월 유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북한과의 협조가 더 절실하다고 박정희 정부가 믿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북한에 사전 통보한 것 자체는 시비 걸 일이 아니다. 남과 북이 진심으로 서로를 믿고 의논하는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월 유신’ 전후 한반도 남북에서 양쪽 정권이 마치 공모라도 한 듯이 강행한 제반 사태는 어떤 미사여구로도 분식되지 않는 적나라한 민주주의의 파괴이자 개인권력의 절대화이고 인권유린의 제도화였다. 그러므로 북풍조작으로 이득을 보려는 오늘의 냉전세력들은 북방한계선(NLL)을 거론하며 노무현 정부를 음해하기에 앞서 박정희 정부의 표리부동한 행적을 먼저 살펴야 한다. 소설 <살아있는 무덤>에 그려진 끔찍한 과거는 여전히 잠들지 않는 교훈으로 되살아나 우리 가슴을 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2. 10. 22.)
나는 물론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형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기수들이 1973년경 감옥 안에서 국가권력의 사주에 의해 그처럼 잔혹하게 고문과 폭력을 당하고 있을 줄은 짐작도 못했다. 0.7평의 좁은 감방은 소설 제목 그대로 ‘살아있는 무덤’이었다. 이른바 전향공작으로 불려진 그 폭력 아래 여러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자살했다. 그야말로 악마의 체험이었다. 하지만 소설 <살아있는 무덤>의 감동은 폭력의 고발 자체에 있다기보다 폭력에 굴복하기를 끝내 거부하는 인간의 강인한 내재적 존엄성을 보여준 데 있었다.
이 소설이 오늘 다시 내 주의를 끄는 것은 그 끔찍한 국가폭력이 왜 하필 그 시점에 발생했는가 하는 점이다. 알다시피 1972년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두 사건으로 기록되는 해이다. 다름 아니고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와 이른바 ‘10월 유신’의 강행이다. 조금 시야를 넓히면 그 무렵은 실로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닉슨의 베이징 방문으로 상징되는 미국과 중국의 접근인데, 그 배경에는 중-소 분쟁과 베트남전쟁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수십년 지구를 얼어붙게 했던 냉전체제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박정희 정부의 7·4공동성명 채택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그 나름의 합리적 대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은 민족사의 커다란 전진으로 평가될 이 성명의 발표가 일종의 사기극일지 모른다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7·4남북공동성명에 뒤이은 ‘10월 유신’의 폭거 때문이다. 물론 박 정권은 유신쿠데타를 강행하면서 그것이 마치 통일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조치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홍석률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부는 유신 선포 날짜를 10월14일에 결정하고, 이 사실을 10월16일, 즉 계엄 선포 하루 전에 북쪽에 전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이틀 뒤인 10월18일 남쪽 관리는 다시 북쪽 상대역을 만나 “외세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통일을 하려 하는데,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정치개혁을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다.(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275쪽)
어느 나라 정부든 중대한 결단을 앞두고 이를 관계국가에 귀띔하는 것이 상례다. 한 시간 전에 하느냐 하루 전에 하느냐를 정하는 것은 사안의 성격과 국가 간 관계의 밀접도에 따를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역사에서 남쪽 정부가 북쪽 정부에 이처럼 친절하게 사태를 통보한 예는 아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섣부른 추론이지만, ‘10월 유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북한과의 협조가 더 절실하다고 박정희 정부가 믿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북한에 사전 통보한 것 자체는 시비 걸 일이 아니다. 남과 북이 진심으로 서로를 믿고 의논하는 관계로 발전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월 유신’ 전후 한반도 남북에서 양쪽 정권이 마치 공모라도 한 듯이 강행한 제반 사태는 어떤 미사여구로도 분식되지 않는 적나라한 민주주의의 파괴이자 개인권력의 절대화이고 인권유린의 제도화였다. 그러므로 북풍조작으로 이득을 보려는 오늘의 냉전세력들은 북방한계선(NLL)을 거론하며 노무현 정부를 음해하기에 앞서 박정희 정부의 표리부동한 행적을 먼저 살펴야 한다. 소설 <살아있는 무덤>에 그려진 끔찍한 과거는 여전히 잠들지 않는 교훈으로 되살아나 우리 가슴을 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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