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한반도 디자인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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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24 13:50 조회21,8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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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역사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건축가가 있다. 김석철 교수는 한국 건축사의 양대 거목인 김중업·김수근에게 배웠고, 식민지적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으며, 한반도와 동북아 차원의 스케일로 도시와 국토계획을 스케치해왔다. 그는 올해 두 차례 암 수술을 받으면서도 병동에서 <한반도 그랜드 디자인>을 집필해 출간했다. 그의 구상은 장기적이고 거대해서 단기 효과를 바라는 정치인들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이 되기 어렵고 디테일을 추구하는 전문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40여년간 남북통일을 전제로 스케치를 거듭한 노(老) 건축가의 간곡한 메시지를 흘려버리기에는 그 지혜가 너무 아깝다.
김 교수는 국가 비전의 핵심 주제를 지방권 자립과 남북 동반성장으로 설정하고 있다. 남한을 지방권과 수도권으로 나누고, 여기에 북한을 추가하여 각기 인구 2500만의 세 권역으로 나누어 지속적인 성장동력의 기반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는 경제발전이나 분단체제 극복의 과제와 관련해서 매우 의미 있는 구상이다. 그러나 현재 조건과 이행 경로를 감안하면 수많은 난관이 있다.
김 교수는 지방권이 독립·자립적인 단위가 되려면 지방권 전 지역을 통괄하는 독립된 행정단위가 필요하고, 세종시를 그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세종시에 국회의사당을 이전하고 국립대학 통합본부, 다국적 과학교육단지, 국가상징구역을 건설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해결해야 할 많은 논점이 있다. 새로운 국가 기능을 수행하는 지방권 수도를 정하는 것은 헌법 개정이 필요한 일이다. 국가 기능을 둘로 쪼개는 일이 아니더라도 국가 기능의 일부나 상당 부분을 분할하는 일도 대대적인 정부조직·행정구역 개편을 수반한다.
지방권 자립경제권역은 좀 더 현실에 가까운 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지방권의 중심인 광역시와 중소도시 사이에 도농복합 중간도시를 두고 농식품업을 수출산업으로 적극 육성할 것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김해·대구·청주·무안의 네 공항을 도시화하고 대가야 지역의 지방권 통합공항 건설을 제안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더 논의해볼 과제이다. 농업·농촌의 혁신 없이는 지방권 부흥이 어렵다는 지적은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당장 시급한 과제는 농업생산력 기반의 붕괴를 막고 품질경쟁력을 갖춘 지속가능한 농업의 구상을 정비하는 것이다. 남부권 신공항의 필요성은 수긍할 수 있으나 항공 수요와 입지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서울·수도권에 대한 대책도 있다. 지금까지 서울의 확대 과정은 큰 문제가 없었으나, 최근에는 시장과 공장의 창출보다는 부동산 사업에 몰두해 결과적으로는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문제의식이다.
용산·뉴타운·신도시 등이 난파하고 있고 서울의 산업이 높은 지가와 임금 수준으로 중국에 밀리는 현실을 꿰뚫고 있다. 디자인시티 사업을 살리고 개성공단~서울도심산업~경인공단을 잇는 산업도시회랑 건설을 추진하자는 제안은 계속 논의될 필요가 있다. 지하공간을 적극 개발하여 소프트 인더스트리의 전진기지로 만들자는 것도 더 구체화해볼 필요가 있는 창의적인 발상이다.
두만강 하구 다국적도시 건설 제안은 바로 추진해볼 만한 프로젝트다. 두만강역 일대는 시베리아와 만주 횡단철도가 교차되는 곳으로 대륙과 해양 물류가 교차하는 곳이다. 천연가스 확보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으므로 가스관 사업과 관련해서도 의미가 깊은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수도권의 토지·물·에너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동서관통운하도 친환경적인 프로젝트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여 실행해나갈 수 있는 방안이다.
이제 도시나 국토계획을 몇몇 사람의 아이디어로 밀어붙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났지만, 제시된 거대 구상을 구체적 방안으로 발전시켜 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향후 보다 정교한 계획과 검증을 거친 실행전략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지속적인 토론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경향신문, 201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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