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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자본주의, 어디로 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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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22 10:09 조회25,7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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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적 취약성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일요일 방송들은 매시간 그리스 총선소식을 톱뉴스로 전하고 있다. 같은 날 프랑스에서도 총선이 진행됐고 이집트에서는 대선 결선투표가 있었지만, 그건 그리스만큼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계경제가 그리스만 쳐다본 하루”라는 다음날 아침 신문의 제목이 너무도 분명하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제금융에 찬성하는 정당이 제1당으로 올라선 투표결과에도 불구하고 “파국은 면한 것이 아니라 지연됐을 뿐이다”란 보충설명이 뒤따라, 장차 그리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다.

  사람들이 그리스 선거에 촉각을 곤두세운 까닭은 두말할 것 없이 이 나라의 선택이 유럽 경제의 앞날에 중대한 분수령이 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최악의 사태가 전개되어 유로존이 붕괴되고 유럽 경제가 혼돈에 빠진다면, 미국도 난국을 피할 수 없고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도 심각한 위험에 처할 것이 뻔하다. 이 사실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세계경제 전체가 구조적으로 심히 취약하다는 것이고, 그리스는 다만 그 구조의 ‘약한 고리’에 해당할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오늘 그리스를 때린 위기가 내일 또 어디를 건드릴지 짐작하기 어렵고, 결국 수백년간 세계경제를 지배해온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이렇게 비틀거리다가 수명을 다하는 건 아닌지에 생각이 미칠 수밖에 없다.『자본주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로버트 하일브로너, 윌리엄 밀버그 지음, 홍기빈 옮김, 미지북스 2010)라는 제목의 책을 손에 잡은 것은 그런 의문에 해답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해서이다.

  가능한 한 일상생활의 언어로 경제(사) 현상을

  역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도 사람들이 경제 경제 하니 나도 한번 ‘경제’를 이해해보겠다고 경제학 교과서를 펼쳤다가 질려버린 선의의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과연 그렇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하루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람인데도, 그 먹고사는 문제를 다룬 이론에 접근하는 것이 범인들에게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 자신도 전문용어에 치여서 제대로 경제학서적을 통독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지도 없이 낯선 곳을 여행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이 책의 첫 번째 미덕은 나처럼 훈련받지 않은 독자도 웬만큼 이해할 수 있도록 씌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가능한 한 일상생활의 언어로 경제(사)적 현상을 기술하고자 노력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독자를 얻기 위한 전략만은 아니다. 경제학 입문자를 위한 일종의 교과서로 집필된 점도 평이한 서술에 일조했겠지만, 무엇보다 경제가 독자적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생활에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저자들의 생각이 서술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령 저자들이 보기에, 오늘날 미국인들은 물질적 풍요에 너무도 익숙해 있어서 당연히 계속 부유하게 살아가리라 믿지만, ‘현존하는 사회조직의 메카니즘’이 효과적으로 기능하기를 멈춘다면 그 믿음은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부유하지만, 부유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부유한 것이지 개인으로서 부유한 것이 아니다.”(p.22) 이것은 오늘날 ‘탐욕의 1%들’에게 매우 교훈적인 지적이라 생각되는데, 따라서 “경제에 대한 탐구의 초점은 인간사회의 여러 제도들에 있다.”(p.30)는 저자들의 견해는 설득력이 있다. 또한 사회에 대한 서술이 사회적 소통을 지향하는 것도 대단히 자연스럽다.

  표면적 현상만으로는 이해 어려운 ‘경제적 사회’

  이 책은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오래전의 고대사회를 간단히 살펴본 다음 “당대의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라는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내놓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경제학의 존재라는 프리즘을 통해 고대사회와 근대사회의 성격을 단적으로 대비하게 만든다.

  당대에는 ‘경제학자들’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중략) 당시 사회의 경제학 —즉 사회가 경제적 존속이라는 기본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는 양태에 대한 탐구 —이란 것이 생각이 깊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문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폐처럼 실제경제의 작동을 알기 위해 꿰뚫어보아야 할 ‘베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시장에서의 계약처럼 복잡하게 칭칭 얽혀 있는 관계를 풀어내야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사회의 경제적 리듬이 존재하여 그것을 해석해야 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p.68~9)

  다시 말하면 고대사회에서는 경제활동이 드러난 부분과 숨어있는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아무것도 감추어지거나 일그러짐 없는 투명한 사회적 패턴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으므로, 그런 사회의 경제는 굳이 연구할 필요를 유발하지 못했다. 이것은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는 표면적 현상만 가지고서는 그 작동의 원리를 꿰뚫어보기 어려운 ‘난해성’을 본질적으로 지닌 사회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 1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1장은 개념과 방법에 관한 개괄적인 서론이고, 제2장은 자본주의가 성립하기 이전의 고대와 중세의 사회경제적 특성에 대한 간명한 요약이다. 특히 중세 봉건주의 부분은 근대사회의 태동을 예비하는 전(前)단계로서 근대 자본주의의 혜택과 질곡을 동시에 경험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제3장 ‘시장사회의 출현’부터 본론이 전개된다. 이 책의 저자들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자주 인용하는 아담 스미스(1723~1790)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① 사람들이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활동의 결과에 따라 지위가 정해지고 자유롭게 개인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으며, ② 사회에서 수행되는 거의 모든 일이 화폐로 보상되는 체계, 즉 경제생활의 화폐화가 진행되며, ③ 규제와 조정이 사라지고 자유롭게 작동하는 시장수요의 압력이 경제를 움직이는 사회, 즉 시장사회가 출현하게 된다. 이제 경제활동의 영역은 “그것을 둘러싼 사회생활의 모태로부터 떨어져 나오기”(p.130)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과거에도 경제가 독자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지만, 시장사회의 출현 이후에는 경제활동이 “인간존재 전체를 지배하는 특징”(p.130)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지난날 사회에서 정치권력이나 종교권력이 했던 중심적 역할을 이제 이윤동기에 기반한 시장권력이 대신하게 됨으로써 경제가 사회운용의 기본원리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경제적 사회’라 명명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형성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원제(Making of Economic Society)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격변과 수정의 역사, “어떤 개입을 얼마나?” 여전히 논쟁

  그런데 이 사회는 만인의 축복 속에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화폐화의 진행에 따라 노동•토지•자본 등 생산요소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품적 성격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 중 그 어떤 것도 누가 계획하거나 예견한 것이 아니었으며, 환영을 받았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p.132) 아마 이 점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불변의 특징, 즉 그 무한한 가변성과 역동성 및 비할 바 없는 적응력의 원천일 것이다. 어떻든 경쟁을 통한 시장체제의 ‘자기조정 과정’(p.153)은 여러 방면에서 저항을 받았다. 중세의 봉건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이 부르주아지에게 잠식되는 것을 달가워할 리 없었고, 길드의 장인(匠人)들 또한 사업가로 변신해서 경쟁에 시달리게 되는 변화를 원치 않았다. 농민이야말로 이 과정의 최대 희생자로서, 그들은 땅에서 쫓겨나 도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자체는 이 모든 불만과 희생을 딛고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한 발전이 최초로 폭발적인 양상으로 진행된 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이었다. 우리가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것인데, 다음의 묘사는 그 혁명이 어떤 사회적 격변을 동반했는지 피상적으로나마 실감케 한다.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글래스고, 뉴캐슬, 론다 밸리 등은 대부분 황무지였거나 농장 이었다. 1727년 대니얼 디포는 맨체스터를 ‘촌락에 불과’하다고 묘사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이 지나자 맨체스터는 100개의 서로 연관된 공장들과 기계공단, 용광로, 피혁 및 화학공장 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단지역으로 변해버렸다. 근대적인 산업도시가 생겨난 것이다.(p.181)

  이 인용을 보면 1970,80년대 한국현실의 변화를 ‘압축적 근대화’라고 타박했던 것이 지나치게 양심적인 태도였다는 생각조차 든다. 어떻든 분명한 것은 근대화 즉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이 책에 묘사되고 있는바 창의적 발명가와 모험적 사업가들 —부르주아계급의 위대한 혁명전사라고 부름직한 존재들의 무한히 헌신적인 투쟁이 낳은 계획되지 않은 결과라는 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는 이미 아담 스미스의 시대부터 주기적인 경기후퇴의 파동에 조금씩 주춤거리면서도 영국을 출발지로 하여 유럽대륙으로, 미국으로, 또 다른 대륙으로 1929년까지 힘찬 전진을 거듭했다. 그런 과정 끝에 등장한 것이 바로 대공황인 것도, 그리고 대공황의 극복과정에서 ‘뉴딜’이라고 하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수정이 행해진 것도 우리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 시대를 검토하면서 진술한 다음의 언급은 오늘의 우리도 새겨들을 만하다.

  어떤 종류의 개입을 어느 만큼이나 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쟁점이었고 이는 지금도 그러하다. 시장의 작동을 개선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으며, 시장의 결함을 해결하겠다는 의도로 이루어진 시도가 되레 거추장스런 관료적 훼방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중략) 뉴딜의 진정한 유산은 시장을 그대로 둔다고 해서 항상 공공의 이익에 맞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며 민주적 정치체 내부에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경제적 활동과 비경제적 가치들 사이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정부밖에 없다는 인식이다.(p.297)

  시장근본주의자에 대조되는 온건한 개입주의자로서의 저자들의 입장이 나타나 있는 대목이라 할 터인데, 그 점은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평가에서도 확인된다. 그들은 1960년대, 70년대의 유럽사회가 말로는 사회주의를 내세웠어도 실제로는 여전히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일종의 유럽판 뉴딜’(p.336)이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유럽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자들의 복합적 평가는 오늘의 중국체제를 해석하는 데까지 연장된다. “정치적 중앙집중화는 여전하지만, 여기에 국내 및 외국 민간기업에 고도의 재량권을 부여한 자본주의 비슷한 장려책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중국은 정치적 엄숙주의와 이단적 자유방임이 흥미롭게 뒤섞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p.547) 그러나 저자들은 ‘중앙계획’으로 추진된 강권적 사회주의가 소련에서 실패한 것과 달리 “중국이나 다른 가난한 나라들처럼 산업적 풍요의 단계로 올라서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회에서는 모종의 ‘군사적 사회주의’가 당분간 계속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p.430)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는?

  이 책은 원래 1962년 로버트 하일브로너(Robert L. Heilbroner, 1919~2005)의 단독저서로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둔 뒤 여러 차례 개정증보판이 나왔고, 최근에 윌리엄 밀버그(William Milberg)와 공동작업으로 12판을 준비하던 중 하일브로너가 작고했다고 한다. 이 12판이 간행된 것이 2008년이므로 이 책은 당연히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월가의 금융위기 이전에 서술이 종결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공상을 해본다. 만약 하일브로너가 아직 생존해서 밀버그와 더불어 월가의 금융위기뿐만 아니라 오늘의 유럽 위기까지 공동토론을 하고 13판을 쓴다면, 그런 경우에도 그가 자본주의에 대해 여전히 다음과 같은 낙관론을 피력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21세기 동안 최소한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지배적인 경제조직 양식이 될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아마 그다음 세기에도 그럴 것이다.”(p.561) 물론 그는 곧 이어서 이 자본주의라는 말이 “아주 다양한 종류의 사회들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탄력적”이라는 단서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원적 역동성과 혁신가능성에 대한 아담 스미스 이래의 신뢰의 대열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역사적 도전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자본주의가 대공황 같은 내부적 도전과 소련식 사회주의라는 외부적 도전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는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방금 진술한 것과 같은 새로운 확신에 도달했을지 모른다. 물론 그가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해 단순히 낙관하는 것만은 아니다. 가령, 그는 “가장 무서운 장벽은 생태적인 과부하”라고 보며, 생산과정에서 발생하게 마련인 “거대한 에너지 담요 같은 것이 대기권을 덮어버리면서 ‘지구 온난화’라고 부르는 효과” (p.553)를 낳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국내적 및 세계적 차원의 빈부격차에도 주목한다. 적어도 이 점에서만은 그는 미래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 “생태적인 지평이 정말로 좁아들거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관계가 계속 현재와 같이 적대적인 길을 가게 된다면 자본주의가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p.432) 그러므로 불안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다음과 같은 언급한 것은 어쩌면 그로서는 가장 정직한 고백일지 모른다: “우리는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이미 우리는 이 질문에 믿을 만한 대답이 있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p.527)



염무웅 영남대 명예교수
(다산연구소 이달의 책, 2012.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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