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자유민주주의의 적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6-22 11:00 조회26,85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자유민주주의의 적
강시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군홧발로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달 초 육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사열했다. 또다른 그의 모교인 대구공업고등학교는 지난달 30일 그의 자료실을 열었다. ‘자랑스런 동문 전두환 자료실’이란 이름을 단 그곳엔 그의 흉상도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가 만든 군부 내 사조직으로 쿠데타에서 한몫을 한 하나회 소속 장교였던 강창희 의원은 새누리당에서 국가 서열 2위의 국회의장 후보로 지명됐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뤘다고 자랑하는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침탈한 ‘반란의 수괴’로 단죄됐던 자가 민주국가를 지킬 간성이 될 사관생도의 ‘사열’을 하게 하고, 고등학생들이 그를 ‘자랑’으로 여기게 가르치려는 이 기막힌 행태를 누가 초래했는가? 겉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내걸면서 실제로는 그 본질을 훼손해온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의원 주도의 새누리당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새누리당은 강령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를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박 의원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정체성 수호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인 양 내세웠다. 예를 들어 사학법 개정에 그토록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도, 특정 이념을 가진 집단이 학교에 들어가 국가정체성을 흔드는 교육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할 정도다. 그런데 우리 현대사에서 그가 국가정체성의 근간이라고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흔들어 온 것은 이른바 종북세력 같은 특정 이념 집단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유린한 쪽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군부 쿠데타를 감행해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이들이다.
박 의원과 새누리당이 정녕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를 유린했거나 하려는 세력에 대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모두 비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박 의원과 새누리당은 한쪽 눈은 감아버린다.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부정 의혹 사건으로 촉발된 종북논란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인 국가관을 의심받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돼서는 안 된다”며 종주먹을 들이대면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쿠데타를 두고서는 오히려 구국의 결단으로 추어올린다. 독재의 방편이었고 박 의원 자신도 한발을 담갔던 유신에 대해서조차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런데 그게 과연 역사의 평가를 기다릴 일인가? 우리 사법부는 이미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반란과 내란죄 등의 책임을 물었다. 쿠데타의 주역이 이미 사망했고, 시간이 오래 경과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두 쿠데타를 달리 취급해야 할 까닭을 알기 어렵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또 어떤가? 최근 대법원에서는 전두환 정권 당시 고문조작 시국사건으로 알려진 ‘학림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음을 인정하고, 피고인들에게 사과까지 했다. 황 대표는 당시 항소심의 배석판사였다. 우리 헌법 12조 2항은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그는 고문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언이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한 채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 동조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신체의 자유를 인정한 헌법을 위배한 판결을 냈으니 이 역시 새누리당이 내세우는 국가정체성에 대한 훼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황 대표는 비서를 통해 피해자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을 뿐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북한인권법에 대한 발언을 이유로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에게 대한민국 의원에 걸맞은 국가관을 갖고 있는지 자격심사를 해보자고 했던 그가 말이다.
새누리당의 실질적 주인과 당대표가 이 모양이니 그들이 말하는 국가정체성이니 자유민주주의니 법치니 하는 말들이 진정성 있게 다가올 리가 없다. 그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을 옭아매는 오랏줄 정도의 의미라고나 할까. 그러니 전두환 전 대통령 같은 이가 겁없이 설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의 적은 과연 누구인가?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12. 6. 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