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안철수 현상'과 87년 체제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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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8-01 13:20 조회29,4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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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매우 어렵다. 단골 식당에 들렀더니 대뜸 하소연이다. “죽을 지경입니다. 지난 4월께부터 아주 힘들어졌습니다. 이대로 가면 버틸 수가 없습니다.” 정치는 불신의 대상이다. 식사 전 타이어를 교체하느라 카센터에 앉아 있는데, 드나드는 이들이 대선 후보를 화제에 올렸다. 선호하는 후보는 모두 달랐지만, 이구동성인 바가 있었다. “정치는 뿌리째 싹 바뀌어야 한다.”
일찍이 그레고리 헨더슨이 관찰한 한국 정치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변화에 대한 열망이 ‘안철수 현상’이라는 소용돌이로 나타나고 있다. 그간 한국의 정당·언론·지식인들은 정책적 대립을 반영하는 독자적·중간적 집단으로 기능하지 못했다. 모두 정치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행태를 보일 뿐이었다. 보수는 물론 진보 이념도 대중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통솔하는 구심점이 되지 못했다. 대중의 에너지는 종종 자기조직화해 새로운 기류를 만들어냈고 어느 순간 소용돌이가 되어 중앙권력을 향해 휘몰아쳤다. ‘안철수 현상’이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가 과거의 시대를 허물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과거의 시대는 ‘87년체제’라 할 수 있다. 87년체제론은 1987년의 민주화가 여러 측면에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전환점이었고 그 이후의 사회변동을 통일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통찰이다. 87년체제를 어떻게 정의할지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87년체제가 세계체제·분단체제에 조응하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정치체제와 경제모델을 지니는 것으로 생각한다.
87년체제의 환경이 되었던 세계체제에서는 미국의 일극적 헤게모니 속에서 글로벌화와 금융자본주의가 전개되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으로 금융자본이 집중되고 미국의 대외적 군사활동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는 세계 경제위기로 확산되었고 선진국 경제의 위축은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의 영향력은 커졌지만, 중국의 경제성장 역시 수출 중상주의 성과에 힘입은 바 크기 때문에 향후 중국의 성장세도 둔화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는, 동북아 차원에서는 냉전체제로, 한반도에서는 분단체제로 구체화된 바 있다. 분단체제에서는 남북한 국가 주도의 성장체제를 구축했으며 이로부터 형성된 기득권 세력이 과대 팽창해 있다. 한국의 민주화에도 민주주의 체제가 불안정한 것은 분단과 전쟁 속에서 이념적 대립이 구조화한 데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가 주도로 불균형 성장을 추진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 추세에 편승한 재벌체제가 그 외형을 크게 확대했으며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엄혹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한편 자본 내, 노동 내 격차와 지역 간 격차는 심화되었다. 국가 주도 성장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속에서, 대기업·정규직·수도권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중소기업·비정규직·영세자영업·비수도권은 소외의 그늘이 깊어졌다.
87년체제를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주는 요소는 정치체제이다. 1987년의 민주화는 군부독재통치를 경쟁적 정당체제로 이행하게 했지만, 그 정당체제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1987년 이후의 정당체제는 지역정당체제였다. 유권자의 지역주의에 기반해 보수 주도의 중앙집권국가는 계속 유지되었다. 보수·진보의 이념적 선호는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소외된 대중의 목소리를 대표해주지 못했다. 이 때문에 87년체제에서는 제도권 정치체제에 포괄되지 않는 대중의 열망이 변화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곤 했다.
이제 87년체제를 규정하던 요소들이 변동과 이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적인 장기침체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고, 북한은 해방 이후 최대의 시스템 변동의 시기에 들어가 있다. 한국의 경우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조합에 의한 발전모델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성과를 내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대중은 기존의 정치질서를 불신하고 그것에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은 중심부와의 네트워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대중에게는 곧바로 권력 중심부를 흔들어버릴 소용돌이의 에너지가 있다.
87년체제의 종말이 머지않았다면, 그 이후의 경로에 대해 준비할 필요가 있다. 세계체제·분단체제의 변동 시기에 남북 및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조합에 의한 집권적 발전모델은 네트워크형 조직에 의한 분권적 발전모델로 전환해야 한다. 보수 주도의 중앙집권적 국가모델에서 분권형 국가모델로 넘어가야 한다.
‘안철수 현상’은 새로운 질서로 이행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여기에는 핵심 과제들이 있다. 한반도 차원의 위기 관리와 서민경제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발전모델의 혁신을 위해서는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 분권화 개혁으로 대중의 정치참여를 확대해야 한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 경제학
(경향신문, 201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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