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관] 권력의지와 정치논쟁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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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9-03 13:20 조회28,18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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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태풍이 지나가는 사이 폭염에 시달리던 날들을 기억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문득 계절이 바뀌었다. 서쪽바다에 휘몰아친 대자연의 위용도 위용이지만, 대통령의 느닷없는 독도 방문으로 촉발된 한·일갈등으로 동해의 파고 또한 높아졌다. 한반도 양안의 이 강풍 탓인지 한창 진행 중인 야당후보 경선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1야당 후보가 어떻게 결정되느냐는 대선의 풍향을 가름할 변수다.
민주당의 경선과정이 흥미로운 것은 권력과 인간의 문제를 되짚어보는 일종의 인문적 성찰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문재인 후보에 대한 비판으로 본격 제기된 권력의지의 유무 논쟁이 바로 그 계기다. 권력의지를 공적인 ‘소명의식’과 연관시킨 문 후보의 주장과 이에 맞서 민중에 대한 연민과 강한 실천정신이 진정한 권력의지라는 손학규 후보의 발언은 경선에 어떤 정치철학적 의미가 실리게 한다. 이것은 지난 여름 일종의 소극으로 끝난 새누리당의 경선과는 현격히 구별될 뿐 아니라 선거에서 일찍이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대선에서 권력의지 유무나 그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것은 유례가 없지 않나 한다.
권력의지라는 말은 쓰는 이에 따라 달리 이해되지만 역시 대선후보를 염두에 둔 만큼 무엇보다 ‘대통령이 되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선 출마자에게 그런 의지가 있느냐고 묻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일 듯도 하다. 그러나 대권의지의 유무 자체가 토론주제가 되면서 권력의 의미와 권력자의 자세를 검증해볼 수 있는, 단순히 정치적이지만은 않은 삶의 문제가 환기된다. 대권의지의 이면은 대권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지와 욕심 사이의 이 긴장을 심문하는 것은 진정성과도 유관한 도덕성 검증의 높은 수준을 말해준다.
권력이라면 대개 정치권력을 말하고 대통령 중심제의 국가에서 그 정점이 대통령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치권력만 하더라도 견제와 균형을 위해 의회와 분점되어 있거니와 언론 경제 등 시민영역의 권력 또한 정치권력에 어느 정도 맞설 만큼의 세력을 가진다. 나아가서 권력은 도처에 있다는 푸코의 관점을 따르면 권력의 미세한 촉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이 권력의 편재성을 생각하면 권력의지라는 것도 달리 볼 여지가 있다. 실제로 니체에게 권력을 향한 의지는 자신을 성장시키고 퍼뜨리고 주위를 다스리고자 하는 본능과 같은 것, 한마디로 생의 충동이기도 하다. 세상 자체가 권력의 의지들이 부딪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권력의지의 유무를 묻는 것이 무의미할 법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니체적 의미의 생의 충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권력의지를 당연한 것으로 긍정하는 데서 나아가 권력을 정치권력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순간, 정치판에서 마키아벨리즘이 득세하고 인간의 요소는 퇴색한다. 니체의 생각이 오용되면 가령 히틀러가 그러했듯이 파시즘의 씨앗을 키우는 셈이다.
권력의지가 개인의 권력욕과 결합한 결과의 폐해는 히틀러까지 갈 것도 없이 박정희를 비롯한 과거 독재자들의 면모에서 여실하다. 강한 권력의지가 민주사회에서 결코 미덕만은 아니다. 권력욕을 스스로 제어할 만한 자기수양이나 인간이해가 갖추어지지 않은, 즉 인문적인 소양이 없는 통치자가 스스로를 망치고 나라도 어렵게 만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민주당 경선이 마이너리그라거나 흥행실패라거나 하는 비아냥이 들린다. 정치공학의 관점으로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더라도 꼭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거니와, 이 경선과정에서 민주적 심성이나 자기성찰의 능력이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토론의 품격을 무시한 소치다. 인문의식이 배어 있는 논쟁의 이 새로운 지평이야말로 구각을 탈피하고 새 정치를 탄생시킬 희망일 수 있다. 강력한 권력의지를 찬양하고 인간적 면모를 오히려 약점으로 치부하는 관점은 역사상 진정한 지도자가 인문적인 품성을 지녔다는 점을 간과한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지도자, 광화문을 지키는 이순신과 세종대왕도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던가?
윤지관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2.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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