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마쓰오 다카요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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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9-03 13:27 조회26,4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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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문화·민주주의 표상한 ‘정치적 조커’로서의 다이쇼 천황
1946년 1월1일, 미국과 일본 보수파의 이해관계가 교묘하게 맞아 떨어진 데 힘입어 전쟁책임을 면제받은 천황 히로히토는 패전 후 처음으로 연두교서를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신화나 전설에 기대어 천황을 ‘현인신(現人神)’, 즉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어 모신 제국일본의 기이한 믿음을 부정하면서 자신과 국민 사이의 유대가 신뢰와 경애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 말한다. 일본의 매스 미디어는 이것을 두고 천황의 ‘인간선언’이라 대서특필했으며, 신이라 불리던 사나이가 나는 인간이라고 일부러 선언했다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코미디가 연출되었다. 이후 히로히토는 온화하기 그지 없는 조류(鳥類) 박사로 평화와 문화와 학문을 사랑하는 할아버지 이미지로 일본의 상징이 된다.
그런데 이 일련의 전개는 사실 자기도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웃지 못할 블랙 코미디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심각한 것은 군복을 입고 말 위에 올라타 더할 나위 없는 근엄함과 강고함으로 당시 세계 2위의 대군을 이끌던 인간이 불과 6개월 만에 새를 관찰하는 일을 취미로 삼는 온화한 인물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을 비웃은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었고, 천황의 어처구니 없는 변신을 보며 배신감에 치를 떤 구일본제국 군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호소한 이 애처로운 사내를 동정했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바로 천황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일본에서 천황이란 이 블랙홀은 그 어떤 희비극도 능히 집어삼킬 수 있는 사회-문화-정치적 조커였던 셈이다.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이른바 ‘문화통치’의 배경이 된 ‘다이쇼 데모크라시’도 이런 천황의 변신과 큰 연관이 있다. 부국강병의 상징이었던 아버지 메이지 천황과 달리, 1913년에 등극한 다이쇼 천황은 문화와 민주주의를 표상하는 젊음의 상징이었다. 히로히토가 한 몸에서 체현하던 군인과 문화인으로서의 천황은 이미 메이지와 다이쇼 천황에 의해 각각 체현되었던 천황 표상이었던 셈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그런 다이쇼 천황의 이미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마쓰오 다카요시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소명출판)는 부국강병-군인에서 민주주의-문화인으로 정체성을 바꾸어가던 1910~20년대 일본의 정치상황을 민중의 광범위한 운동과 일상적 민주주의의 확립 등을 중심으로 서술한 일본 근대사 연구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에 처음 출간된 이래 이 책은 1994년과 2001년도 두 번에 걸쳐 문고화될 정도로 널리 읽혔고, 다이쇼 데모크라시 연구를 위해서 반드시 거쳐가야 할 선행 연구이기도 하다. 1929년생인 저자는 이른바 ‘전후 민주주의’의 첫 세대로서, 전후 민주주의가 미군 주도의 개혁이라기보다는 전쟁 시기 군국주의자들이 짓밟은 1910~20년대 이래의 민중적 민주주의를 계승하는 것임을 이 책을 통해 밝히려 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등 일부 지식인들의 민주주의적 사상이라 주장했던 기존 연구를 비판하고, 이 민주주의적 사조가 사상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된 민중 운동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설파했던 것이다.
이런 저자의 관점은 전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일본 근대사 연구의 전형을 보여준다. 저자는 일본이 부국강병과 제국주의적 노선을 따라 진보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원리에 입각하여 진화해왔음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물론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국내적으로는 입헌주의를 내세웠지만 대외적으로 제국주의를 천명하는 한계를 지녔음을 강조하면서 저자는 역사적 현실에 입각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민중적 민주주의의 관점에 입각한 매우 균형잡힌 연구서로 평가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책을 읽으면 이 관점 자체가 매우 역사적 산물임을 느낄 수 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천황이라는 블랙홀을 대입시켜보면 근대일본의 자기 정체성은 카멜레온처럼 변모해왔음을 알 수 있기에 민주주의 노선을 따라 진보해왔다는 그의 굳은 신념이 참으로 순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금의 일본 정부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현재의 아키히토 천황이 언제 말을 타고 칼을 찬 군인으로 거듭날지 모를 일이다. 이제 마쓰오의 이 책을 수명이 다한 낡은 책으로 만드느냐, 아니면 아직도 생명력을 지닌 고전으로 만드느냐, 일본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민중 전체가 그 기로에 서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든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경향신문, 2012.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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