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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정치콘텐츠는 외주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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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9-28 15:23 조회26,3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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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바뀌어야 우리 삶이 바뀐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정치인치고 좋은 정치를 해보겠다고 공언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치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왜 그럴까? 왜 ‘분열과 증오의 정치’가 질기게 이어질까? 안철수의 말대로 ‘선거 과정에서 부당하고 저급한 흑색선전과 이전투구’를 자행해서?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계속 바꿔도 정치가 별무신통이면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와 지역주의가 결합하여 영호남에서는 두 유력 정당의 정치 독점이 뿌리 내린 지 오래다. 이와 더불어 결선투표 없는 대통령제와 전쟁, 분단, 독재가 낳은 공포와 혐오가 가세하면서 두 당의 정치독점 현상이 전국화되어 버렸다. 정치적 선택지가 두 당 외에는 사실상 없고, 낙선자의 표는 사실상 사표가 되다 보니, 실정에 대한 응징과 변화를 바라는 표심이 두 정당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해왔다.

물론 여기에는 충청에 기반을 두었던 당과 특정 계층 및 이념에 기반을 두었던 당의 간판 인물과 이념·정책적 부실도 일조하였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못하면, 아니 못하게 만들면 자동으로 승자가 되는 시스템, 승자가 행사하는 너무 많은 자의적 권능(국가폭력·규제·재정·자리 등), 소선거구제가 주조한 ‘땅개 정치인’의 협소한 안목, 뒤틀린 역사가 각인시킨 공포와 혐오 등이 분열, 증오, 무개념 정치의 뿌리이자 안철수 현상의 뿌리일 것이다. 사실 여기까지는 한국 정치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조만간 대선후보들이 헌법, 선거법 등 정치관계법 개혁 공약으로 응답할 것이다.

그런데 저질 정치, 부실 정치의 주요 요인임에도 잘 거론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실한 정치 콘텐츠다. 양극화, 일자리 등 핵심 현안에 대한 진단과 해법이 부실하다는 얘기다. 교수, 언론인, 직업관료 등 지식사회가 비방을 가지고 있는데, 정치집단이 알아먹지 못해서 문제라면 해결은 쉽다. 그러나 양극화, 일자리, 경제민주화, 비정규직 해법 등을 찬찬히 뜯어보면 정치집단에 훈수하는 지식사회 자체가 혼미하고 부실하기 이를 데 없다. 예컨대 선진국과 일대일로 비교하면 한국 사회의 기형성 내지 양극화 촉진 요인은 명확하다. 복지지출, 재벌의 지배구조, 시장의 불공정성, 기득권 편향적인 사법관료의 행태 등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래서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좋은 일자리와 청년의 기회와 희망을 무참히 갈아버리는 거대한 맷돌의 다른 한쪽에 대해서는 문제라는 인식조차 없다.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는 시스템, 과점 체제에서 손쉽게 높은 수익을 누리는 은행, 교육시험 사다리의 승자(학벌·학위·자격증 등)에게 주어지는 너무 많은 권리·이익, 조선 말기의 양반관료 비슷한 공공부문, 연대성·공평성(노동의 양, 질에 따른 합리적 처우)과 담 쌓은 노조, 높은 불투명성, 주요 통계·정보의 미비 내지 관료 독점 등은 강력한 양극화 촉진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양극화, 일자리 해법은 푸석푸석한 도낏자루와 무딘 도끼날로 아름드리 고목을 찍어 쓰러뜨리는 일이다. 지식사회 특유의 분절적 사고와 바닥현실에 대한 무지를 경계해야 한다. 정책의 일파만파 파장과 정책간의 연관관계를 추적해야 한다. 대권 주자의 정치 콘텐츠는 교수들에게 외주 처리할 대상이 아니다. 정치적 상상력, 사회역사적 통찰력, 근본 문제에 대한 질문, 용기와 강단의 바탕 위에서 바닥현실을 아는 시민들과 지식사회의 식견을 융합해야 한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한겨레, 2012.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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