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식] 분란 속의 동북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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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9-28 15:53 조회30,57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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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어도(釣魚島) 분쟁으로 중국의 반일감정이 악화일로다. 현지 일본기업, 일본인학교, 그리고 심지어 일식당조차 휴업하는 일이 속출하는 모양이다. 더구나 국치일(9월 18일)까지 겹쳤다. 류탸오거우(柳條溝)사건을 조작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의 침략 81주년을 맞아 반일시위는 더욱 타올랐다. 션양(瀋陽)에 있는 9.18기념관도 최근 관람객이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이고 보면 이번 사태는 정부끼리 티격태격하다가 냉각기를 두고 가닥을 잡는 이전의 관행을 넘는 수준이다. 대륙뿐 아니다. 대만(臺灣)정부가 조어도 주권을 상징하는 우표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에 이어, 대만 주재 일본대표부 건물이 페인트 공격을 당했다는 소식이다. 일본에 상대적으로 온건한 대만의 입장을 염두에 둘 때, 분쟁이 양안을 일층 결합시키고 있는 점에 유의할 일이다. 마침내 일본 우익들도 나선다. 후꾸오까(福岡) 중국 총영사관에 연막탄이 투척되고 수도에서도 반중시위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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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어도 (釣魚島)
중일수교 4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일어난 이 심란한 갈등을 야기한 조어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5개의 무인도와 3개의 도초(島礁)로 구성된 조어도는 중국이름으로는 댜오위다오, 일본이름으로는 센까꾸(尖閣), 대만과 오끼나와(冲繩) 사이에 위치한 군도(群島)다. 청일전쟁을 마감하는 시모노세끼(下關)조약(1895)으로 요동반도․대만과 함께 일본에 할양된 조어도는 태평양전쟁을 결속하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1951)으로 오끼나와에 편입, 미국의 신탁통치 아래 놓였고, 미국의 오끼나와 반환(1972)과 함께 일본에 귀속, 현재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조어도는 본래 무인도이기 때문에 오끼나와의 일부인지, 또는 대만 부속도서(島嶼)인지가 불명확한바, 일본의 대만 영유(領有)에 의해 대만과 오끼나와의 경계가 모호해진 점이 화근이다. 알다시피 오끼나와는 원래 유구(琉球)왕국이다. 시마즈번(島津藩)의 침략(1609)으로 그 지배 아래 들어간 유구는 한편 청(淸)에도 조공하는 처지여서 말하자면 양속적(兩屬的)이었다. 이 모호성은 ‘대만출병(臺灣出兵)’으로 통칭되는 모란사사건(牡丹社事件, 1874)으로 보다 명확해진다. 유구국의 표류 관민들을 대만 주민들이 살해한 사건을 빙자하여 청으로 하여금 유구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고 나아가 유구가 일본의 속국임을 인정케 하려는 일본의 군사적 위협이 이 사건의 핵심이다. 협정 후 청은 유구의 중국 귀속을 견지했지만, 이미 힘의 균형이 기운 상태인지라 메이지(明治)정부가 1879년 유구를 오끼나와현으로 처분했어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5년 유구의 이웃 대만도 일본의 판도로 편입되면서 조어도의 귀속문제 역시 유야무야 된 셈이다.(黃昭堂『台灣總督府』, 東京: 敎育社, 47~9면)
조어도 분쟁의 책임은 나변에 있는가? 청이 대만을 영유한 시대에 그 주변의 섬들에 대한 관계를 명확히 하지 못한 책임은 분명히 있을 터이다. 그러나 유구도 대만도 조어도도, 물론 독자적인 해양생활권임에도 불구하고, 일본보다는 중국과 가깝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일본의 팽창주의로부터 이 분쟁이 기원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전쟁으로 할양되었다면 전후에는 당연히 돌려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일본과 함께 미국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 부속섬이 명확한 바도 아닌데 조어도를 오끼나와에 끼워 일본에 돌려주는 바람에 분쟁의 불씨를 살려둔 셈이니까 말이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일본에 유리할 게 없을 조어도 갈등을 확산한 일본정부의 태도를 요해하기 힘들다. 일본의 (극)우파들을 적절히 제어하며 중간을 애써 잡아나가던 민주당 정부가 조어도 국유화 조치를 취한 것은 중국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조어도의 가치가 점점 높아지는 즈음이 아닌가? 황금어장이요, 석유를 비롯한 해저광물자원의 보고요, 중동 석유수송로의 길목이기도 한 조어도는 중국과 미국/일본이 대치하는 제국의 교차로임에랴.
과연 임진년(壬辰年)은 임진년인가 보다. 올해는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발발 7주갑(420년)을 맞는 해다. 한중수교 20주년에 중일수교 40주년까지 겹쳐 잘하면 동아시아의 평화를 심을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연초의 희망은 점점 퇴색한다. 한중수교 20주년도 정부간 갈등으로 가리우더니, 중일수교 40주년은 조어도로 날아가고, 한일관계도 독도(獨島) 분쟁으로 최악이다. 조어도와 독도에 가려 소강상태지만 강한 러시아를 내세우며 아시아 복귀를 기도하는 뿌찐 이후 러일관계도 북방섬문제로 갈등중이다. 동아시아가 임진년처럼 대분란에 휩싸였다. 그동안 쌓았던 한중일 세 나라 사이의 우정이 일시적일 망정 상처받게 된 일이 아프다. 더욱 나쁜 점은 이런 갈등들이 각 나라 안에서 진행되던 개혁의 기운을 꺾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만 해도 ‘아지사이(水菊)혁명’으로 불릴 정도로 거대한 반원전시위가 세상을 놀라게 한바, 이는 일본의 희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러시아, 중국과의 갈등이 1%도 안되는 일본의 배외주의자들을 오히려 흥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아지사이혁명의 순항을 위해서도 중국과 한국에서 다시 불붙은 반일감정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요구된다. 중국의 반일 시위가 한 고비를 넘었다니 다행이다. 참으로 책임은 무겁고 길은 멀다.
최원식 (인하대 인문학부 / 서남포럼 운영위원장)
(서남포럼 2012.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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