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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제약회사 '대박' 비밀은 '신약'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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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29 14:32 조회21,2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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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회사 '대박' 비밀은 '신약'이 아니라…
[프레시안 books]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의 <생명자본>



암 정복이 멀지 않았다든가, 획기적인 신약이, 그것도 우리나라 과학자들에 의해서 개발되었다는 소식은 미디어의 식상하기조차 한 단골 소재이다. 질병이 생기는 기전을 해명하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발견되었고, 개인의 유전 정보도 점점 어렵지 않게 파악하는 기술이 발전하여, 얼마 안 있으면 각자 개개인에게 맞춤 유전자 치료가 가능해진다는 소식 역시 들려온 지 오래이다. 그런데 실상 주변을 둘러보면 획기적인 치료법이 문제가 아니라 다 아는 병으로도 고통을 받는 사람이 줄을 잇고, 나온다던 치료제는 감감무소식에, 간혹 새로 나왔다는 신약은 그 가격이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이쯤 되면 획기적인 신약 개발로 우리 모두가 질병에서 구원되리라는 전망을 과연 얼마만큼이나 믿어야 할까 싶은 회의가 들만도 하련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혹은 곧 그런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또 실제 치료제로 개발되려면 얼마가 걸릴지도 모르는 신물질 발견 소식에 해당 회사뿐만 아니라 관련 바이오 주식 값이 모두 치솟는 것을 보면, 과연 주가라는 것은 무엇이고 돈은 누가 버는 것인지 요지경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카고 대학의 인류학자이자 과학기술학자인 카우시크 순데르 라잔의 <생명 자본 : 게놈 이후 생명의 구성>(안수진 옮김, 그린비 펴냄)은 지난 30년간 생명과학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추적인 동시에 도대체 신약 산업이 어떻게 미래에 대한 약속만으로도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지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저작이다.


이 책은 생명을 정보이자 투자 대상으로 보는 관점의 변화가 없었다면 신약 산업이 기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 동안 신약 산업이 남발해 온 약속들을 따라가다 보면 좋게 말해 과장이고 실제로는 사기로 가득하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 왜 우리는 분노하기보다는 기꺼이 더 많은 투자의 필요성에 동의를 하는 것일까? 순데르 라잔은 새로운 생명공학이 팔아 온 것은 치료제 자체가 아니라 약속이며 희망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의미의 사기나 거짓말과는 다르다고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하면 획기적인 신약이 곧 개발되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언사에 대해, 사기냐 아니냐의 차원으로만 접근해서 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 <생명 자본>(카우시크 순데르 순데르 라잔 지음, 안수진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사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논리는 신약 산업이나 생명공학 분야에서만 통하는 논리는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역시 현재의 문제를 분석하고 계산하여 미래를 예측하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전망 속에서 현재의 불확실성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작동이 이루어진다. 실제 결과가 다르게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현재의 불확실성이라는 이름으로 '예측'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사기가 아닐 뿐만 아니라 약속과 과학적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다. 순데르 라잔이 자본주의가 생명과학이나 생명공학의 발전 방식을 큰 틀에서 규정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일반론을 넘어서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현재 자본주의가 이러한 모습을 띠는 데는 생명과학과 생명공학의 발전이 기여한 바도 크다는 것이다.


현대 생명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나타난 미래에 대한 관점과 새로운 종류의 과학적 사실에 대한 언명들은 현대 자본주의의 작동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 체계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이용 방식 속에서 경제적 체제와 인식론적 체제는 서로를 동시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이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핵심적인 주장이며, '생명 자본'이라는 표제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지식과 경제의 영역에서 더 나아가 도덕의 영역, 감정의 영역과도 연결된다.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는 기술에 대한 신앙적 믿음과 결합하여 미래에 대한 예언을 물신숭배하도록 한다. 특히나 생명을 구하는 의료에 있어서 약속이 지켜져야 할 시한은 끝없이 연장될 수밖에 없으며, 희망은 지속되며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는 작동을 계속할 수 있다.


사실 신약 개발이란 고도로 자본 집약적인 사업이고, 치료 효과가 있는 분자를 시장에 출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오늘날 존재하는 대부분의 생명공학 회사들은 신약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 발견, 즉 신약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분자를 확인하는 데 몰두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상품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상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또 생명과학이 생산하는 지식 가운데 상품화될 수 있는 것은 신약이나 새로운 치료 방법이라기보다는 분자 진단 시약들이다. 거의 모든 질병들은 그 인과 관계가 한 두 유전자의 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유전자 차원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극도로 어려운 일이며 결국 각 개인의 미래 질병 가능성을 밝히는 일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 유전체(게놈) 연구가 약속해 온 개인별 맞춤 의료라는 것은 치료 방법의 제공이 아니라 질병에 걸릴 가능성에 대한 지식의 제공이고, 이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언젠가 실현될 수도 있을 치료법에 대한 기대감만으로도 이윤 창출이 가능해지는 것이며, 이는 다시 언젠가는 반드시 치료제가 만들어져서 환자들을 고통에서 구원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에 의해서 합리화된다. 결국 현대 생명과학의 변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러한 특정한 지식-경제-도덕의 배치를 가져왔는가가 이 책을 통해서 저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명공학 회사들과 제약회사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미국과 인도의 제약 산업은 각기 어떤 상이한 역사적, 제도적 맥락을 가지고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왔는지, 또 그러한 다른 맥락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각기 논리는 다를지언정 모두 유전체학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위해 순데르 라잔은 생명과학의 변화와 신약 개발, 생명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재현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따라서, 미국에서 인도까지, 실험실에서부터 기업까지 여러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인류학적 현지조사 방식을 택하고 있다.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했지만 사실 <생명 자본>은 읽기에 만만한 책은 결코 아니다. 유전체 연구 이후의 약물 유전체학의 발전이나 맞춤형 의료의 탄생, 신약 개발을 둘러싼 제약회사와 생명공학 회사 사이의 차이와 긴장 등에 대해서 각자 관심 있는 분야를 따라 읽을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인류학적 현장 연구를 통해 습득한 경험 자료를 바탕으로 과학 연구와 정치경제학에 사회 이론적 개입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과학이나 사회 이론 어느 한 쪽에 대한 관심만으로는 따라가기가 벅찬 편이다.

책의 번역은 어느 역자든 피하기 어려운 정도의 오탈자나 부분적인 오역 외에 결정적인 오역은 많지 않은 편이지만, 그러나 번역에만 의지해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역자가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의 지적인 계보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옮긴이가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STS'를 이미 한국에서도 하나의 학문 분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이 아니라 '과학, 기술, 사회(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의 약자라고 하면서, "넓게 보아 과학이 비과학과 접목되어야 한다는 시각"으로 풀이한 데서도 드러난다. 과학적 지식을 사회적 맥락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과학과 비과학,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 자체를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접목이라는 해설은 독자들을 오도할 우려가 크다.


사실 이 책은 <생명 자본>이라는 제목 덕을 많이 본 듯도 싶다. 생명의 상품화 자체를 문제 삼는데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미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는 도로시 넬킨과 로리 앤드루스의 <인체 시장>(김명진·김병수 옮김, 궁리 펴냄)이나 도나 디켄슨의 <인체 쇼핑>(이근애 옮김, 소담출판사 펴냄)과는 결을 달리하지만, 제목에서부터 생명과학과 자본주의를 연결시켜 보겠다는 저자의 의도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반적으로 푸코의 생명 정치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다른 저작들이 정치경제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는 경우도 많은 데 비해서, <생명 자본>에는 자본이나 잉여 가치의 생산이나 유통, 순환 등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심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실상 <생명 자본>에서 마르크스보다 더, 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푸코 이상으로 큰 존재감을 보이는 것은 자크 데리다이다. 제약회사의 존재를 신약 시장에서 다른 행위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유령으로 묘사할 때, 기술적으로 매개된 신앙의 가능성과 과학기술 담론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메시아주의를 지적할 때, 또한 생명공학의 약속을 분석하면서 계산 불가능성에 대해 논의할 때,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윤리 개념을 비판하면서 정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데리다는 순데르 라잔이 자신의 논지를 엮어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이론적 자원으로 등장하고 있다. 경험적 연구와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논의를 결합하는 것은 과학기술학이나 최근 인류학 연구 동향에서 낯설지 않은 경향이지만, 국내의 독자들에게는 익숙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생명 자본>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약간 뜻밖이었다. 생명과학과 생명공학, 생명 윤리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국내에서도 관심 있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많이 있지만,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인류학적인 접근 방식의 중요성을 높이 사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 자본>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점차 활기를 띠게 된 과학기술 인류학의 성과 가운데 하나이며, 중요한 연구 중의 하나이지만 <생명 자본>이라는 제목과 저자의 논문 한편이 <뉴레프트리뷰>의 논문 모음을 통해 먼저 소개되지 않았다면 과연 번역이 되었을까 싶기도 하다.


사실 순데르 라잔은 2009년에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을 둘러싼 한국의 사회 운동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바가 있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인도의 제약회사들이 글리벡의 복제 약을 생산하게 된 것은 브라질의 세계사회포럼에서 한국 운동가의 투쟁을 접한 것을 계기로 해서였다고 한다. 그러한 연결점들을 생각하면서 접근한다면 <생명 자본>이 약간의 난해함을 감수하더라도 조금은 더 읽어볼 만한 책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프레시안, 201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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