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렬] ‘제로톱’ 축구와 국립대 통폐합 > 회원칼럼·언론보도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회원로그인

회원칼럼·언론보도

[이필렬] ‘제로톱’ 축구와 국립대 통폐합

페이지 정보

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7-09 14:25 조회26,005회 댓글0건

본문

‘제로톱’ 축구와 국립대 통폐합



국립대 통폐합 논쟁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에 끝난 유로 2012 축구대회가 생각난다. 우승한 스페인에는 골잡이가 따로 없었다. 결승전의 네 골은 선수 넷이 사이좋게 나누어 넣었다. 한국 대표팀이 좋아하는 원톱이나 투톱 같은 건 아예 두지 않고 미드필더들이 모두 공격에 가담한다. 끊임없이 서로 공을 주고받으면서 골문을 향해서 뛴다. 상대 수비가 에워싸도 정확한 패스로 따돌리고 골을 넣는다.

스페인의 단신 미드필더 사비나 이니에스타는 도움주기의 달인이다. 그들은 긴 패스도 하지 않고 멀리서 중거리슛도 쏘지 않는다. 손발을 맞추어서 골문 앞으로 달려갈 수 있는데 개인 플레이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메시도 그들이 있기에 펄펄 난다. 그가 아르헨티나 대표팀에만 가면 맥을 못 추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원톱이나 투톱을 두고 고전적인 경기운영을 하는 자국 대표팀에서는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것이다.


국립대 통폐합 논쟁에서 핵심 쟁점은 축구의 원톱과 같은 서울대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반대쪽에서는 통폐합은 서울대를 없애는 것과 다름없고, 1등을 추방하고 나라를 3류로 만들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서울대 캠퍼스는 남지만 현재 형태의 서울대는 사라진다. 서울대가 없으니 서울대에 들어가는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는 1등도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데 이런 비판 앞에서 통폐합 제안자들은 서울대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고 어정쩡하게 변명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골잡이 없는 축구경기를 상상하지 못하듯 1등 대학 없는 대학교육도 상상을 못하는 것 같다. 1등이 없으면 어떠냐는 생각은 거의 못한다. 제안자들의 변명도, 국립대가 통폐합되면 몇몇 사립대가 1등이 되리라는 비판도 그런 상상력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도 축구는 좀 낫다. 두꺼운 허리 없이는 골잡이도 힘을 쓸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

국립대 통폐합안의 핵심 내용은 대학을 평준화하자는 것이다. 그 첫단계가 통폐합을 통해 평준화된 국립대이다. 대학이 평준화되면 중간층이 두꺼워진다. 허리가 강해지는 것이다. 허리가 강하면 웬만한 공격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균형이 잘 잡히기 때문이다. 물론 기발함이 부족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머리만 크면 불균형도 커지고 약한 공격에도 잘 넘어진다.


중유럽과 북유럽 대학은 대부분 국립이고 대체로 평준화되어 있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웨덴이 그렇다. 반면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한국 등은 대학에 확고부동한 서열이 매겨져 있다. 그런데 이들 국가를 사회적 균형이나 경제적 건전성이라는 시각에서 비교해보면 평준화 국가가 더 우위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나라들에서는 노벨상 같은 1등상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에 비해 미국이나 영국에는 하버드니 케임브리지니 하는 1등 대학이 즐비하다. 노벨상 수상자도 쏟아져 나온다.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그 상을 꽤 받아간다. 그러나 1등은 많지만 허리가 제대로 받쳐주지 못해서인지 우리나라 형편은 모두 좋지 않다.

스페인 대표팀에는 스트라이커가 없다. 여러 명이 정교한 패스를 하며 공격을 펼치는 스타일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1등이 방해가 되어서 추방한 셈이다. 그래도 그들은 1등을 앞세워 공격을 펼친 팀들을 모두 물리치고 우승했다. 국립대 통폐합은 바로 우리나라 대학을 스페인 대표팀처럼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도 1등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려대나 연세대 같은 사립대를 원톱으로 내세우려 할지 모르겠다. 그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되기 어려울 것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부할 수 있는 개방적인 국립대, 국가에서 등록금을 전액 부담해주는 국립대를 마다하고 폐쇄적이고 값비싼 사립대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우승으로 원톱이 없는 축구의 새 시대가 열렸다. 우리 대학교육에서도 국립대 통폐합이 성공적으로 도입되어 원톱이 사라지고 중간이 두꺼워지는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경향신문 2012. 7. 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Segyo Institute.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TEL. 02-3143-2902 FAX. 02-3143-2903 E-Mail. segyo@segyo.org
04004 서울특별시 마포구 월드컵로12길 7 (서교동 475-34) 창비서교빌딩 2층 (사)세교연구소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