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정치를 넘어선 정치'에 문학이 관여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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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7-13 11:46 조회27,88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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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넘어선 정치’에 문학이 관여하는 일
도종환 시인의 작품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삭제되는 참화를 면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다행한 일이다. 정파적 대립이 일상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신속하게 이런 결과가 도출된 것은 모처럼 맛보는 상식의 승리였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의 권고가 명령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알고 있는 교과서 출판사들로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단·정계·언론이 입을 모아 평가원의 조처를 비판함으로써 문학작품의 가치가 행정기관의 자의적 칼날에 재단되는 불상사를 막은 것이다.
여야를 떠나서, 그리고 이른바 보수·진보를 넘어서 한목소리로 정치적 중립성을 빙자한 정치적 과잉이라고 성토한 것은, 도종환이 국회의원이 된 것은 6주에 불과하지만 그의 시가 교과서에 실린 것은 벌써 10년째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인들이 그의 작품 삭제 지시에 항의한 것은 단지 그가 초보 정치인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자전적 산문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2011)를 읽어보면 이 따뜻한 시인의 삶이 뜻밖에도 어린 시절부터 차가운 시련과 고초의 연속임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시인이 된 뒤에도 그는 교육운동가와 문화활동가를 겸하는 난코스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보답으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감시와 처벌, 해직과 감옥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이 모든 난관을 흔히 말하는 강철 같은 투쟁보다는 극히 부드러운 포용의 정신으로 넘어서고 있고 바로 그것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적 애송시 ‘담쟁이’가 전하는 메시지가 말하자면 그것이다. 이런 점이야말로 그의 문학이 이룩한 근원적 의미의 정치성이고 지금까지의 우리 현실정치에 결여된 덕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 사람의 파블로, 즉 카살스와 피카소와 네루다의 예술세계에 있어 폭력과 독재에 대한 저항은 결코 정치적 외도가 아니라 그들의 예술적 위대성의 불가결한 일부인 것이다. 그 점에서 정치를 넘어선 정치의 착지(着地)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은 도종환의 인생에 주어진 새로운 과제일지 모른다.
이런 원칙적인 논의와는 별도로, 교과서 검인정 문제야말로 만인이 관심을 가질 중대한 사안임을 상기하고 싶다. 보도를 보면, 평가원이 국어과 검정심의회를 열어 삭제 통보를 철회하기로 결의한 10일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는 “교과용 도서 검정 업무는 장관이 평가원에 위탁한 업무로서 평가원이 자기 권한과 책임하에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교과부 입장’이란 문건을 내놓았다. 그러면서도 교과부는 장관이 “평가원을 지휘·감독하며, 필요한 지시를 하거나 조치를 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권한은 장관이 가지되 책임은 평가원에 넘긴다는 것이 교과부의 설명인 셈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문제의 출발점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있고, 그 발상의 책임자는 현 교과부 장관이다. 통상적인 연한을 앞당겨 개정을 서두른 까닭은 어디 있는가. 혹시라도 6월 민주항쟁 이후 축적된 민주주의의 이념적 성과를 중등학교 교과서에서조차 씻어내자는 저의를 가진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현 정부야말로 교육을 정치에 오염시켰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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