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 새로운 10년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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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9-12 12:13 조회23,5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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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선이 100일도 남지 않았다. 곧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이 마무리되고 안철수 교수의 입장도 분명해질 것이다. 한·중·일과 미국, 그리고 남북한 관계가 ‘거대한 전환’의 국면에 들어가 있는 가운데, 한국·북한·미국·중국·일본 모두 새로운 리더십 형성의 시기를 맞았다. 한국은 9월 이후 100일 동안이 새로운 국가 시스템을 논의할 때이고, 그 성과가 21세기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향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돌이켜보면, 20세기 동아시아 근대의 기본 틀은 청일·러일 전쟁의 10여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 시기 일본은 우위에 선 국내적 리더십으로 근대국가를 형성하고 동아시아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반면 한국과 중국은 이후 100년간 몰락과 정체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제질서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일본의 상승세가 뚜렷이 확인된 것은 1894년과 1905년 9월이다. 일본은 1894년 8월1일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후 9월15일 평양전투에서 대승하여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했다. 이어 9월17일 황해해전에서 청의 북양함대를 제압하고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이후 일본의 우세가 굳어졌고 1895년 4월17일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청일전쟁은 일본에 도약의 발판이 됐다. 일본은 청 정부로부터 1년 국가예산의 4배가 넘는 전쟁 배상금을 받아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일본은 금본위제를 확립했고, 금본위제를 가진 서구 선진국과의 무역을 확대했다. 또한 중공업에 투자해 산업구조를 고도화했다. 배상금으로 건설한 야하타제철소는 일본 근대공업 발전의 상징이 됐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는 청 정부와 함께 일본을 강력히 견제했다.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청의 보수세력이 의화단이라는 반외세 민중운동을 자극하고 이용하자 제국주의 열강이 군사력을 투입해 이를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군사적 대립이 표면화됐고 양국은 전쟁으로 치달았다. 본격적인 전쟁은 1904년 2월8일 인천항과 뤼순항에서의 충돌로 시작됐다. 러·일 양국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는 소모전을 계속했으나, 1차 러시아혁명과 발틱함대의 궤멸로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됐다.
1905년 9월의 강화회담 결과,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가 확정됐다.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은 조선, 사할린 남부, 뤼순·다롄을 지배하게 됐다. 이후 일본은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을 강행했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전쟁은 일본 자본주의를 군국주의와 재벌체제로 이끌고 갔다. 제철·조선업 등의 발전은 군수공업 수요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졌고, 전쟁을 계기로 중화학공업이 성장하면서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져 재벌지배구조가 확립됐다.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일본이 국가 형성과 공업화에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은 대략 1895~1905년의 10년간이었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제국과 식민지·반식민지로 운명이 갈렸다. 이러한 운명의 분기점을 만든 직접 원인은 국가적 리더십의 차이였다. 조선과 청에서는 기득권에 기초한 구체제가 유지됐던 반면, 일본은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하고 한 발 앞서 근대적 국가체제를 형성했던 것이다.
청과 조선의 개혁세력들은 군주 전제권에 의해 억압되었다. 청에서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을 거치면서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려는 양무파들이 지방에서 성장했으나 중앙 차원에서는 리더십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양무파 관료들은 보수세력의 끊임없는 견제에 시달렸다. 일본과의 군비경쟁이 이루어지는 속에서도 정책 결정 과정은 산만하고 비능률적이었다.
조선의 개화파는 고종·대원군과 갈등관계에 있었으며, 고종은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탄압하고 대한제국을 수립해 전제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일본은 지방의 하층 무사들이 막부체제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적 리더십을 형성했다. 사쓰마·조슈 등 지방에서는 하급 무사 중심으로 반(反)막부파 정권이 수립되었고 이들은 일찍부터 서양과 같은 부국강병을 이끌 강력한 중앙정부 건설을 추진했다. 이들은 1867년 12월 왕정복고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후 신정부는 내전을 거치면서 막부를 제거하고 지방세력을 중앙집권적 국가 속에 흡수해갔으며, 1889년 비서구에서는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20세기의 동아시아 근대화 모델은 일본이 선도한 전쟁과 거대자본 재벌체제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또 변하고 있다. 20세기 말 이래 냉전체제의 이완과 세계화·정보화의 추세는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고, 일본의 리더십과 경제력은 하락했다. 향후 10년은 세계체제의 재편 속에서 한반도 정세가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혁신·복지·통일의 과제가 주어져 있고, 이를 수행할 창조적인 리더십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지금 한국은 운명의 9월,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10년의 길목에 서 있다.
이일영 한신대교수·경제학
(경향신문, 2011.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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