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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은폐된 전쟁으로서의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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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26 12:19 조회21,5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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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 사료가 될 수 있다

  역사연구에서 자료 즉 사료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무엇을 연구하느냐에 따라 자료에 대한 의존도가 달라지고 자료의 성격과 범위도 달라질 것이다. 문헌사료가 빈약한 고대사 연구에서는 그 시대의 인간이 남긴 모든 유산과 유물들이 발언권을 주장할 것이며, 거북 등껍질에 새겨진 한 조각의 문자파편을 둘러싸고도 허다한 쟁점들이 부딪칠 것이다. 오래전의 내 기억으로는 일연 스님의『삼국유사』만 하더라도 어떤 기준에서는 역사라기보다 문학으로 읽혀졌다.

  상상과 현실의 상호침투를 금기로 여기는 현대사연구의 경우에도 문학적 기록은 한 시대의 심층을 밝히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예컨대 홍이섭(洪以燮, 1914~1974) 선생은 연희전문에서 정인보(鄭寅普, 1893~?)•백남운(白南雲, 1894~1979) 같은 분들 밑에서 공부한 정통 사학자였지만, 일제 식민지시대의 정신사를 재구성하기 위해 한용운•최서해•심훈•채만식 등의 문학에 대해 논문을 썼고 그것들을 모아『한국정신사 서설(序說)』(연세대출판부 1975)이란 책으로 내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 홍이섭이 의도한 것은 그 자신이 책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문학적 성취 자체의 해명이 아니라 1920년대의 ‘민족적 궁핍화’와 1930년대의 ‘식민지 농촌현실’이 최서해와 심훈 같은 작가의 작품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당대의 문학 속에는 관청의 기록이나 신문 기사가 보여줄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실감있게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현대사의 정글 속에서

  그러나 현대사로 내려오면 아무래도 사정이 변한다. 우리의 경우 연구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보다 한국사 자체의 고도의 복합성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세기 후반부터 한반도는 바깥에서 밀려드는 외세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물론 일제강점기 동안 한반도 현실을 좌우한 것은 한반도 자체의 오랜 내부적 축적과 일제의 식민지지배라는 외부적 강압이었다고 단순화할 수 있다.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승국들이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의 운명에 관여하는 행위자로 나서게 되는데, 결정적인 것은 8•15 직후 미•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이었다. 그 결과로서의 남북 분단정권의 성립, 6•25전쟁의 발발과 분단체제의 고착은 오늘까지 한반도 현실을 근본으로부터 제약하고 규정하는 원형적 질서로 남아 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분단체제의 전개과정은 관련 당사자들의 다양한 시각을 통해 수많은 공식•비공식 기록으로 남겨졌다. 문서기록뿐 아니라 영상기록도 만들어졌고, 무엇보다 당대를 몸으로 살며 고통을 감내했던 민중들의 기억을 통해 구비서사로 전승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구비서사야말로 역사와 문학이 뿌리내린 토양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나름으로 자료의 권리를 가질 터이므로, 현대사 연구자는 어떤 점에서는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항시 길을 잃을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연구자는 동시에 늘 자료의 빈곤에 시달리는 느낌을 가진다. 각국 정부 차원에서 만들어진 핵심자료가 대부분 비밀처리되어 일반 연구자의 접근이 막혀 있었고, 공개된 경우에도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위작자료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 들어 미국 정부자료들은 비밀이 해제되기 시작하여 학자들의 접근이 허용되었다. 학자들에게 그것은 거대한 광맥에 대한 발굴허가였다. 예컨대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는 “1971년부터 1988년까지 거의 20년간” 북한노획문서를 포함하여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문서를 가지고” 6•25전쟁을 연구했다고 한다. 1981년 그의 책 제Ι부가 출간되었을 때 그것은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으니, 자료의 장벽을 처음으로 넘은 데서 오는 경이였다. 이 무렵부터 그 분야에서 큰 공헌을 한 분은 재미학자 방선주(方善柱) 선생으로서, 그는 1980년대 이후 주한 미24군단 군사실 문서철과 북한노획문서철을 본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국내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자료의 신천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또, 1990년대에는 소련이 해체되고 그쪽 자료가 많이 공개되어 연구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가령, 러시아사 연구에서 시작하여 차츰 한국현대사로 옮겨온 와다 하루끼(和田春樹)의 저서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뿐 아니라 러시아 자료의 적절한 활용이라는 점에서도 훌륭한 경지를 개척했다 할 것이다.

  왜 분단은 장기지속되는가

  브루스 커밍스, 와다 하루끼 같은 외국학자를 포함하여 많은 한국 학자들의 연구가 집중되어온 분야는 6•25전쟁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세계적 차원에서나 한반도 차원에서나 끔찍한 인명희생과 엄청난 국토파괴를 동반했음에도 전쟁은 60년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 평화적 종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달에 소개하려는 홍석률(洪錫律) 교수의 『분단의 히스테리』(창비 2012)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 범주에 드는 연구이다. 이 책을 읽고 난 감상을 우선 한 마디 한다면, 한반도는 아직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자면 분단체제와 6•25전쟁에 대한 공부를 피할 수 없다는 탄식이다. 다만, 휴전 이후 전쟁은 정치와 외교라는 더 복잡한 외양 안에 숨겨진 형태로, 말하자면 은폐된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은 기왕의 전쟁연구서와는 연구대상과 초점을 상당히 달리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6•25전쟁 자체의 연구서가 아니라 전쟁의 결과로 조성된 한반도현실이 어떤 고유한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가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의 말로 하면 “분단상황을 장기지속시키는 한반도 내외의 역학적 구조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p.24)에 해답을 구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니까『한국전쟁의 기원』을 비롯한 많은 저서들이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를 주로 묻는다면 홍석률의 책은 ‘왜 전쟁이 끝나지 않는가’를 따지는 셈이다.

  이를 위해 그가 채택한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최근 공개된 미국 정부문서들, 주로 미 국무부문서들에 대한 분석이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문서들이 얼마나 획기적인 것인지, 그리고 이에 근거한 홍석률의 연구가 선행업적들의 어느 부분을 수정하고 보완했는지 판별할 능력이 없다. 다만 그가 자인한 대로 주로 미국측 자료에 의존했으므로 “미국 자료에 비친 중국의 대외정책”이 중국 자신의 관점과 배치될 수 있고, 일본과 소련도 일면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당사자로서의 한반도사회 안에도 분단과 전쟁을 보는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하고 대립 갈등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둘째, 이 책은 특정한 시기의 남북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즉, 저자는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이 시도된 1968년 1월부터 판문점 도끼살해 사건이 발생한 1976년 8월까지의 기간을 대상으로 사건과 사태들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해나가는 것이다. 이 기간에 연구의 초점을 집중한 것은 물론 의도적인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1970년대 전반기는 “한반도의 분단이 국제적 분쟁에서 남북한의 문제로 내재화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는”(p.29) 시기다. 알다시피 6•25전쟁은 남북한 간의 국지적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여기에 미국 중심의 유엔군이 참전하고 이어서 중국군이 진입한, 즉 국내전이 국제전으로 비화된 전쟁이다. 그런데 이제 미-중접근에 따라 분쟁은 축소의 과정 즉 한반도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홍석률이 이 책에서 1968년부터 1976년까지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위기→화해국면→위기’(p.25)를 반복했던 남북관계의 첫 순환주기가 바로 이때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이 과정에서 그의 렌즈가 향하는 것은 분단을 둘러싼 세 차원의 관계이다. 즉, 저자는 “국제외교관계, 남북관계, 남북한 내부의 정치적 관계를 모두 교차시켜 다차원적인 접근을”(p.40) 하되, 특히 한미관계와 남북대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처럼 다차원적 접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단체제의 유례없는 독특성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독특성이야말로 분단극복의 유례없는 난해성의 핵심일 것이다. 분단은 한반도가 하나의 통일국가를 지향해가는 단일성 문제이자 남북정권 각각의 내부적 정치상황에 직결된 두 개의 문제이며, 미국에게는 일본-타이완-필리핀을 잇는 동아시아전선의 핵심고리를 관리하는 문제이고 중국에게도 국가안보의 사활이 걸린 중요문제이다. 일본과 러시아도 그 나름으로 물러설 수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다고 여길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관련들의 분석을 통해 분단체제의 작동원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위기와 화해의 순환 싸이클

  앞에서도 얘기했듯이『분단의 히스테리』에서 저자는 분단체제의 전개과정에 일정한 패턴이 작동하는 것 같다고 본다. 좀 길지만, 저자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1960년대 말 북한은 대남 무력공세를 강화하면서 어느 때보다도 미국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반미 선전공세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위기국면을 활용하여 미국과 협상을 하고, 미국정부로부터 자신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받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중략) 일반적으로 말할 때 국가가 서로를 인정하려면 대화와 협상,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에 있는 북한은 위기를 고조시키는 방법으로 미국과 직접 접촉과 대화를 하려 한다. 사실 이 방법 이외에 다른 뚜렷한 방법도 없는 형편이다. (중략) 그러다 보니 (미국은) 위기가 고조되어 어쩔 수 없이 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야 불가피하게 대화에 나선다. 여기서 적대적인 위기상황을 창출해야 대화가 시작된다는 북미관계의 ‘이상한 공식’이 출현하는 것이다.(p.78~9)

  저자가 ‘이상한 공식’이라 부른 북미관계의 특이한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였다. 이 책은 말하자면 그 첫 번째 싸이클의 진행경과에 대한 면밀한 추적•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자료수집과 논리전개에서는 학술적 기준을 따르면서도 내용구성과 서술에서는 마치 추리소설과도 같은 서사기법을 원용한다. 제1장은 ‘김신조 사건’으로 속칭되는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미수사건(1968.1.21),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1968.1.23) 및 북한 무장부대의 울진-삼척 침투사건(1968.10.30~11.2) 등 숨막히는 무장충돌의 묘사로 시작한다. 제2장은 1971년 7월 9일 이른 새벽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 키신저가 변장을 하고 파키스탄 차클랄라 공항에 나타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제3장은 1972년 5월 1일 오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청와대 인근 안가(박정희 암살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곳)에 중정 간부들을 모아놓고 “내일 평양에 다녀오겠다”는 폭탄발언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제5장은 “1972년 2월 21일 닉슨이 베이징에 도착한 때는 현지시간으로 월요일 오전 11시 30분이고, 미국 시간으로는 20일 밤 10시 30분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제6장은 1973년 8월 21일 베이징에 있는 미국 연락사무소에 북한 대사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제7장은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대위가 약간명의 병력과 노무자들을 이끌고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러 나갔다가 결국 북한 군인에 의해 ‘도끼살해’되는 사건으로 번지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여 사건의 복잡한 정글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서사적 기법이다. 어떻든 저자의 안내를 따가다 보면 우리는 하나의 사건을 매개로 남한과 북한,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 때로는 베트남과 타이완 등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들의 상반된 이해관계가 연합하고 길항하는 복잡한 드라마를 순차적으로 통과하게 된다. 가령, 닉슨의 베이징 방문에 대한 나라들마다의 다른 속셈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미국은 중국과의 접근을 통해 소련을 봉쇄하고자 했고, 중국은 미국을 지렛대로 해서 소련에 대항하고자 했다. 북한은 미군철수 주장의 명분을 찾으려고 미-중접근을 지지하는 반면 소련과 베트남은 중국의 배신에 반발했다. 일본은 ‘닉슨 쇼크’에 놀라 미국보다 오히려 중국과의 수교에 앞장섰다. 한편 “닉슨의 베이징 방문선언은 한국정부가 북한측에 직접접촉과 교류를 제안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남북의 정책변화는 누가 먼저라고 하기 어렵게 동시에 이루어졌다.”(p.156) 그러나 남북 정부는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도 목표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통일을 명분으로 내세운 체제강화에 주력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소위 ‘10월유신’이 그것인데, 한 마디로 유신은 개인권력의 절대화이자 자유민주주의의 폐기였다. 북한은 북한대로 사회주의헌법의 제정을 통해 주석제를 채택하고 개인우상화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민주주의를 버렸다. 이런 과정을 살펴본다면 이 시점에서는 남북대화는 각자의 목표추구를 위한 겉치레에 불과하고, 결국 양자는 종래의 적나라한 적대관계로 돌아가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남북문제는 정쟁의 도구가 아니다

  『분단의 히스토리』를 읽고 있노라면 1970년대 초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2010년대 초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사이 베트남과 독일이 통일되고 중국이 G2로 우뚝 서고 남북한이 6•15선언(2000)과 10•4선언(2007)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는데도 그런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40년 전의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다시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면 분단체제는 내리막길로 들어선 것이 확실하다. 이 책은 분단의 극복을 위한 한 연구자의 고뇌가 짙게 깔려 우리의 감동을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최근 대선과정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북방한계선(NLL)에 관하여 이 책의 연구내용을 참고삼아 소개하겠다.(p.357~361) 북한이 서해 5도 주변해역을 분쟁지역화한 것은 1973년 12월부터였다. 왜 그때 문제가 되었나. 1953년 휴전협정은 육상경계선은 세밀하고 정확하게 규정했지만, 해상분계선은 명확하게 확정하지 못했다. 서해 5도는 38선 이남이어서 전쟁 전에는 남한 관할이었고 전쟁 중에도 북한군이 점령하지 않았다. 휴전회담 때 섬의 영유권은 전쟁 전의 상태로 하기로 합의되어 그 점이 휴전협정에도 명시되었다. 그러나 주변해역에 관해서는 명문규정이 없었다. 그런데 휴전 직후 유엔군사령관은 일방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설정하여 남측 선박(군함이든 어선이든)이 그 이남에서만 활동하도록 조치했고, 북측에서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73년 12월 1일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서해 5도 주변해역을 자시의 관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그 시점에서 그런 주장을 폈고 그것이 노리는 바는 무엇인가. 홍석률은 그 점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우선 그가 주목하는 것은 북한의 주장이 “유엔에서 언커크(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가 해체된 직후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언커크가 해체된다는 것은 유엔군사령부의 존재가 문제화된다는 뜻이었다. 유엔군사령관은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그 이행을 담보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휴전협정이 개정되거나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북한의 관할권 선언은 남한과 미국을 향한 것이지만 중국을 겨냥하는 측면도 있었다. 예로부터 그곳은 중국 어선들이 자주 출몰하는 해역일뿐더러 북한으로서는 미-중공조로 언커크가 해체된 데 대해 중국에도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미국은 이것을 남북한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로 취급하고 간여하려 들지 않았다. 아무튼 그 후에도 이 해역은 남북관계 및 미중관계의 변화에 따라 일촉즉발의 충돌지역으로 변했다가 다시 평온해지는 오르내림을 거듭하고 있다.

  엊그제(2012.10.24) 국회 외교통상위 국감장에서 류우익 통일부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NLL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남과 북은 서해 해상경계선 문제에 대해서 '쌍방은 지금까지 관할해온 불가침경계선을 준수하기로 한다'고 합의했고 지금까지 당시 합의를 존중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역대 정부는 일관된 입장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NLL을 '영토선'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류우익 장관은 "헌법이 규정한 영토의 개념으로 보면 영토의 경계라고 할 수 없다"면서도 "남북 간의 특수상황을 감안하면 영토선에 준하는 경계선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정쟁의 도구로 삼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다산포럼 201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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