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 타자의 욕망, 변경의 배움 : 『일본변경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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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8-31 11:15 조회37,1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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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미 말해놓은 일본/일본인론이 반복되고, 이즈쯔 토시히꼬(井筒俊彦)로 대변되는 동양적 신비주의의 비의가 일본/일본인의 미래적 가능성을 타진한다. 『일본변경론』(우찌다 타쯔루 內田樹, 갈라파고스 2012)은 일단 그렇게 읽힌다.
하지만 새로울 것이 없다고 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없음은 이미 저자도 쿨하게 인정하는 바이며, 스스로가 선현의 훌륭한 말씀의 “발췌문”이라고 한껏 몸을 낮추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을까? 그 까닭은 일본인들이 “뛰어난 일본문화론을 읽어도 금방 까먹고 다음에 나오는 일본문화론에 정신이 팔려버리기” 때문이고, “선현이 남겨주신 귀중한 앎을 서재에 고이 모셔두기만 하고 자꾸 반복하여 언급하고 확인하는 노력을 집단적으로 게을리”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방 까먹고 자꾸 반복하여 언급하고 확인하는 노력을 집단적으로 게을리 했다는 것이야말로 저자가 말하는 일본/일본인론의 핵심이다. 그것은 단순히 선현의 말씀을 소홀히 했다는 상투적 훈고학이 아니라, 일본/일본인의 ‘배움’에 내재한 근원적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자꾸 새로운 것으로 옮겨가고 옛것을 들춰보지 않는 배움의 태도, 저자가 말하는 ‘변경’의 특성이란 일차적으로 이를 말한다. 이 태도는 주체로 하여금 이미 자신이 뒤쳐져 있다는 전제하에서 세상과 사물과 인간과 자연과 마주하게끔 한다. 그래서 옛것을 창고에 버려두고 자꾸 새것만을 좇는 배움의 행태가 생겨난다. 중화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의 변방 일본이 그랬고, 19세기 서구의 충격으로 근대화에 발을 내디딘 메이지 일본이 그랬다. 이 전통 안에서는 일본/일본인의 자아 인식은 언제나 앞서간 중화 혹은 서구와의 비교 속에서 이뤄졌으며, 자아가 주체적으로 외부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자아가 비로소 확정되는 역방향의 주/객 분리를 경험했다.
마루야마 마사오를 비롯한 수많은 석학들이 말하는 일본/일본인론이란 이런 것이었다. 자신의 내부에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문화나 문명을 가늠하는 주체적 좌표를 갖추지 못한 까닭에 일본의 자기인식은 “우린 이렇게 하면 안 돼, 중국에서는 말이야”라든가 “영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바꿔야 한다”는 식의 어법으로 발화되었다. 이런 자기인식의 틀은 메이지 이래 일본의 폭주를 가능케 한 인식과 실천 태도를 규정했다. 개인에게 현실을 상대화시켜 독립적으로 가늠케 하는 판단기준이 결여되었기에, 개개인의 인식과 실천은 언제나 상위의 권위를 곁눈질하며 결정되었으며, 이런 개개인의 비자립적 결정들이 복합적으로 중첩된 결과가 저 가공할 만한 천황제 파시즘을 낳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일본/일본인론은 우선 이 선현들의 가르침을 반복한다. 하지만 그 가르침을 차이나게 반복하는 것이 저자의 강점이며, ‘변경’론의 두번째 함의이다. 저자는 전도된 주/객 경험 위에 구축된 일본의 자기인식과 판단이 변경이라는 처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결과라 주장한다. 즉 위에서 말한 변경적 인식/실천 태도란 ‘중심-변경’이라는 틀 안에서 스스로를 후진적 주체라 규정하는 형식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랬을 때 변경에 자리한 자들은 결국에는 중심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실현되든 안되든 이때 변경은 중심의 자리를 욕망하는, 즉 타자의 욕망에 충실한 존재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의 변경적 처지를 변경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중심으로부터의 변경, 결여된 중심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근대 일본이 저지른 끔찍한 침략전쟁이 이 고루한 욕망의 산물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변경을 변경으로 끝까지 사고하고 그 위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인식/태도의 변화가 요청된다. 저자는 이런 맥락에서 일본 정신사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무도(武道)’의 ‘기(機)’ 사상에 주목한다. 여기서 무도의 기 사상을 자세히 해설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한가지 함의만을 짚고 넘어가자. 그것은 ‘배움’과 관련된 함의이다. 앞에서 말한 새로운 것만을 좇는 배움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중심에 대한 욕망과 중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뒤쳐진 변경의 처지에서는 수긍이 갈 만한 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배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 욕망과 태도를 돌파하려 한다. 일본도 중심이라느니, 변경의 처지에서 그나마 잘 살아남았다는 식의 일본 긍정론과 저자의 이야기가 다른 지점이며, 저자의 독창성이 비롯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배움은 어떤 기술이나 내용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즉 근대적인 학교 교육의 배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반대로 저자는 무엇을 배울지는 몰라도 배움이라는 결단에 내재한 ‘선행적 앎’에 주목한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결심한 이들은 그 내용이나 기술과 상관없이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배움에 앞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변경의 처지에 있는 이들의 배움이며, 사실 배움이라는 인간적 행위의 근원이다. 중심에 있는 이들은 이런 배움의 선행적 앎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배움이란 어떤 프로그램의 절차적 습득을 말하기 때문이다. 현재 대학에서 수업에 앞서 씰라버스나 커리큘럼을 제시하라는 것은 전적으로 중심의 배움인 셈이다. 그러나 변경의 배움이란 삶의 조건이기도 한 까닭에 마치 언어처럼 아무런 전제 없이 그 관계 속으로 내던져지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저자는 이를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브리꼴뢰르(bricoleur)와 같은 것이라 말한다. 언제 쓸모 있을지 모르지만 잡동사니를 모아두었다가 이리저리 짜집기하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브리꼴뢰르에는 아무런 프로그램이 없다. 대신 이 물건이 어디엔가 쓸모 있을 것이라는 ‘선행적 앎’이 있을 뿐이다. 저자가 말하는 변경의 배움이란 이러한 배움의 근원적 힘인 셈이다.
결국 저자는 이러한 배움의 힘이야말로 일본/일본인의 미래적 가능성을 개시하는 것이라 말한다. 책 말미의 일본어론 등을 비롯하여 후반부 전체의 논의가 여러 사례들을 통해 이 미래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에 할애되어 있다. 그것은 일본/일본인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태도를 변경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펼쳐보지 않는 옛것 속에 미래의 가능성이 있다는 방법론적 각성이기도 하다. 과연 이런 저자의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여기서 가늠할 수는 없지만 한가지 사실만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저자의 이러한 ‘변경론’이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책은 3·11 이후의 파국과 혼란 이전에 쓰였지만, 21세기 들어 일본 사회가 요청해온 모종의 패러다임 전환에 호응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타자의 욕망에 충실히 따른 결과 이룩한 성장과 발전을 회의하고 의심하기, 그리하여 변경의 처지를 끝까지 밀고나가 인식과 실천 태도의 변화를 모색하기, 이런 『일본변경론』의 성찰과 제안은 현대 일본이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해준다.
김항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
(창문블로그, 2012.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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