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선] 아직 끝나지 않은 야만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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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9-19 12:32 조회22,6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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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선생님 사모님께
사모님, 차마 안녕하시냐고 여쭙지 못하겠습니다. 사모님께서 다시 선생님 영정을 들고 통곡하는 그 참담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안녕’을 여쭙겠습니까? 2007년 1월 인혁당 사건 재심에서 고교 은사이신 김용원 선생님의 무죄가 확정된 후 <한겨레>를 찾은 사모님께선 32년 만에 처음으로 발을 뻗고 자게 됐다고 하셨지요. 지하에 계신 선생님께도 이젠 편히 눈을 감으시라고 했다고도 하셨고요. 그때 우리는 종신집권을 위해 사법살인도 마다하지 않은 저 야만의 시대는 이제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했지요.그러나 우리가 너무 쉽게 안도했던 것일까요. 사법살인의 최종지휘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개의 판결이 있으니,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역사에 맡겨야 한다고 해 다시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재심 판결이, 군법회의에서 각본에 따라 내려진 사형선고를 확정한 하자투성이였던 75년 대법원 판결을 무효화한 사법부의 최종판단임에도, 그는 마치 두 판결이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듯 이야기했습니다. 법치의 근본을 뒤흔드는 발언이라는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재심 판결을 존중한다고 한걸음 물러섰지만, 또다시 당 대변인의 사과성명을 부인함으로써 사모님을 비롯한 유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논란이 심해지자 박 후보는 지방언론 등과의 회견을 통해 사태 수습을 꾀했습니다. “지난 시절 피해를 입으신 분들에 대해 딸로서 참 죄송스럽다고 말씀도 드렸고, 위로의 말씀도 드렸다”며 “그걸 사과로 받아들여야지 자꾸 아니다라고 하면 진정한 화해의 길로 갈 수 없다”고 말이죠. 상당수 언론들은 그가 사과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사과를 기정사실화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일본의 과거사 인식을 다룬 <사죄와 망언 사이에서>의 저자 가토 노리히로가 말했듯이 “사죄는 입 밖에 내어야 하지만, 아무리 입 밖에 내어 말해도 그 행위에 미치지 못하는 사죄”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신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과 그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망가진 유가족들의 아픔을 한두 마디 말로 달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박 후보는 사법살인 당시 퍼스트레이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보좌했습니다. 그의 범죄에 단순한 딸 이상으로 ‘연루’돼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그가 피해자들과 화해하려면 훨씬 더 진정을 보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선 그런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과 대신 죄송이나 위로란 말을 쓴 것부터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태도가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로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이렇게 과거 지향적인 이야기만 계속 나오고 국민이 힘들어하는 현실의 문제, 미래에 관한 얘기는 실종되다시피 됐다”고 개탄합니다. 과거 인식 문제가 현실이나 미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인 듯이요.
과거사에 대한 박 후보의 태도는 왜 한국은 과거사 타령만 하냐며 사죄와 망언을 되풀이하는 일본을 떠올리게 합니다. 최근에만 해도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군대위안부 문제에 사과한 고노 담화를 부인하려는 작태를 보였습니다. 이런 일본에 대해 박 후보는 “역사인식을 바로 가져야 된다. 이게 안 된다면 경제·안보 협력이나 문화 교류, 미래세대 간의 교류가 전부 지장을 받는다”고 경고했습니다.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선 일본에 바른 역사인식을 요구하는 그가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지도자의 바른 역사인식이 긴요하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본이 성숙한 민주국가가 되려면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분명한 반성을 해야 하듯이 박 후보가 이 나라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려면 인혁당 사건과 유신 같은 아버지의 부의 유산과 절연해야 할 텐데요. 박 후보가 이루겠다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에선 사모님 같은, 야만의 시대 피해자들의 꿈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더는 정치적 폭압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대한 꿈 말이죠. 그가 그런 꿈에도 관심을 쏟을까요?
권태선 편집인
(한겨레, 201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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