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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대한민국 정체성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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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9-28 15:55 조회33,2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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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체제론의 행방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이 8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랫동안 뜸을 들이던 안철수 교수가 지난주 출마를 공식화함으로써 주요 후보의 윤곽이 드러났고, 이렇게 되자 정국은 사실상 선거전에 돌입한 셈이 되었다. 지금은 세 후보 모두 조심스러운 탐색의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한 터라, 이번 대선이 1987년 12월처럼 허탈한 결과에 이를지 아니면 2002년 12월처럼 대세론을 뒤엎는 기적을 만들어낼지, 예측을 불허한다. 각 언론기관들이 발표하는 여론조사도 새로운 이슈가 생길 때마다 그에 따라 지지도가 출렁이는 양상을 보인다. 어떻든 이제 분명해진 사실은 야권 후보가 가시화되는 것을 계기로 여당 후보의 안정적 우위가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탐색전이란 게 원래 그런 건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후보들마다 주로 책잡히지 않을 세부적 정책들을 내놓는 데 주력할 뿐이고 올해 선거를 통해 구성될 새 정부의 근본성격과 국가발전의 기본방향에 대해 원대한 구상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월 이 난에서 다루었던 백낙청 교수의 『2013년체제 만들기』를 다시 한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 책에 개진된 백 교수의 문제의식은 1987년 6월항쟁의 제반 개혁적 성취들 즉 ‘87년체제’가 직선제 개헌과 6•15선언의 도출 같은 중대한 전진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부 후반부터 말기증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결국 이명박 정부와 같은 퇴행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 퇴행을 결정적으로 바로잡을 기회가 바로 금년의 총선•대선인바, 단순히 1987년 또는 2000년의 성과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해서는 그런 단기적 목표의 달성도 기대하기 어렵고, 따라서 그것들을 획기적으로 뛰어넘는 담대한 원(願)을 설정함으로써만 87년체제를 극복하고 나아가 한반도 현실의 전면적 비약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던 것 같다. 그렇게 크게 업그레이드될 한반도 현실의 모습을 백 교수는 ‘2013년체제’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2013년체제’론의 호소력은 아쉽게도 4•11총선의 패배로 급격하게 소진되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의 대선전을 더 지켜보아야 드러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2013년체제 만들기』에서 제출된 거대담론이 ‘2013년체제’라는 개념 자체와 더불어 오늘의 공론장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총선승리를 발판으로 추진될 예정이었던 개혁의 프로젝트가 첫 단추부터 어긋나버린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백 교수 자신은 총선결과를 ‘잘못 예측한’ 데 따른 자기반성을 겸하여 변화된 정치정세에 대응하는 개혁진영의 자세에 대해 좀더 근본적인 성찰을 시도하고 있고, 그것이 ‘변혁적 중도주의’에 대한 새로운 검토로 나타난 바 있다.(「2013년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 창작과비평 2012년 가을호 참조) 하지만 변혁이나 중도와 같은 ‘추상수준이 높은 개념’을 매개로 진행된 일종의 내부적 성찰이 일반 대중과의 소통에 한계를 가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일 것이다.

  우리가 갖고 싶은 나라

  생각건대 현시점에서 핵심적인 것은 ‘2013년체제’라는 개념의 시효 자체나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용어의 현실적합성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론가에게는 개념의 선택이 사고의 정밀성을 가늠하는 척도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실을 설명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수준 높은 이론작업이 이 세상 어느 일각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런 작업과의 연결을 잃지 않으면서도 대다수 국민들 가슴속에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국가현실의 근본적 개선을 견인할 수 있는 간명한 실천적 언어가 제시되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그것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1947) 맨뒤에 붙은「나의 소원」이라는 글이다. 다들 아는 유명한 문장이지만, 그래도 한 대목 읽어보기로 하자.

  나는 어떠한 의미로든지 독재정치를 배격한다. 나는 우리 동포를 향하여서 부르짖는다. 결코 독재정치가 아니되도록 조심하라고. 우리 동포 각 개인이 십분의 언론자유를 누려서 국민 전체의 의견대로 되는 정치를 하는 나라를 건설하자고. 일부 당파나 어떤 한 계급의 철학으로 다른 다수를 강제함이 없고, 또 현재의 우리들의 이론으로 우리 자손의 사상과 신앙의 자유를 속박함이 없는 나라, 천지와 같이 넓고 자유로운 나라, 그러면서도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되는 나라가 되도록 우리나라를 건설하자고.(백범학술원 총서②『백범일지』, 나남 2004 재판, p.441)

  그림처럼 아름다운 나라의 모습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사람에 따라서는 여기 묘사된 국가상(國家像)이 지나치게 막연하고 단지 이상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백범이 이 글을 썼던 1947년의 구체적 상황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백범은 그때까지 70평생 오로지 독립투쟁에 매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간고하게 지켜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해방후 외국 군대가 점령한 조국땅에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1947년쯤에 이르면 남한에서는 임시정부의 집권가능성이 사라지고 한반도 전체로서는 민주•자주•통일정부의 수립이 사실상 무산된 상태였다. 이 과정에는 백범 자신의 정치적 오류도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위의 문장은 바로 그런 비극적 상황의 산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이 글의 어조가 조금도 절망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글은 자손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들려주듯 담담하고 지혜롭다. 65년의 세월을 넘어 이 글이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우리가 갖고 싶은 나라’에 대한 백범의 소망이 그의 가식 없는 애국심의 발로로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일부에서 애국이란 말 대신 국가관이란 용어가 쓰이고 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정보기관에 잡혀가면 수사관들로부터 “국가관이 의심스러운 자들”이란 욕을 먹었다. 때로는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고 터무니없이 사건을 날조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국가관을 가지고 일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헌신하는 반면 자유니 민주주의니 떠드는 것은 안보를 해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잠적한 듯했던 이 낱말이 다시 공론의 자리에 등장하고 있다. 가령, 근자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을 겨냥하여 “국가관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국회의원 노릇을 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바로 엊그제는 "국가관이 투철한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체 국가관이란 어떤 내용을 가진 개념인가. 이때 국가란 ‘대한민국’을 가리킬 텐데, 언필칭 국가관을 입에 담는 사람들은 이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이고 그 헌법적 토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민주헌정의 뿌리에 대한 두 갈래의 탐색

  공교롭게도 지난 8월 아주 비슷한 제목의 책 두 권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김육훈의『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휴머니스트 2012)과 서희경의『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창비 2012)이 그 책들이다.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대한민국의 탄생’을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려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부제가 ‘우리 민주주의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이고 후자는 ‘한국 헌정사, 만민공동회에서 제헌까지’이다. 이 부제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전자는 구한말부터 대한민국 탄생까지의 한국 근대사에서 민주공화국의 이념이 어떻게 발생•발전해왔는가를 더듬고 있고, 후자는 같은 기간에 공화주의 이념과 운동들이 어떤 내부적 갈등과 이론적 조정을 거쳐 어떻게 실제의 헌법조항으로 구현되어왔는가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책은 각각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탐색한 자매편 같은 느낌을 준다.(앞으로『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은 <민주>로,『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은 <헌법>으로 약칭한다.)

  이렇게 두 책은 공통의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아주 다른 종류의 저작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민주>가 대중적인 교양서임에 비해 <헌법>은 본격적인 연구서라는 점이다.

  <민주>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연구나 독창적인 이론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는 있지만 굳이 원문대로 옮겨서 가독성을 떨어트리지 않았고, 대체로 출전을 밝히고는 있으나 학술논문에서와 같은 까다로움을 부리지 않았다. 저자의 목적이 계몽적인 교양서였던 만큼 이것은 옳은 방침이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집필에 참고했던 선행연구의 목록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더 깊은 지식을 얻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타인의 연구에 의존한 부분과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나타낸 부분을 구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저서의 신뢰성을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고 믿어진다.

  반면에 <헌법>은 정통적인 학술서이다. 문외한이 함부로 얘기해서는 망발이 되겠지만, 이 책은 우선 ‘제1장 서론’만 읽어보더라도 마치 X레이로 촬영된 신체 내부 뼈조직의 사진이 생명체의 구성원리를 밝히는 데 기여하듯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형성과 작동에 헌법제정의 진화과정이 어떻게 뼈대노릇을 했는지 이해하게 만든다. 이 책은 이렇게 고도의 전문성으로 무장되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일반 독자들의 현실감각을 자극하고 오늘 우리 삶의 객관적 조건에 대해 질문하도록 만든다. “헌법의 외양은 딱딱한 법조문일 뿐이지만, 그것이 탄생하고 지속되는 과정은 생생한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만큼 헌법은 다채로운 의미를 지닌 산 생명체이다.”(헌법, p.32) —헌법(연구)에 관한 이런 관점이 전편에서 관철됨으로써 이 책은 어떤 무미건조한 연구소재도 유능한 연구자를 만나면 연구실을 벗어나 만인에게 살아 있는 지식과 깨달음을 주게 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한번 내 분수에 넘는 소리를 한다면 명저의 반열에 들 만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것이 우리 헌법 제1조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해방후 처음 알았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였다”(민주, p.12)고 알고 있다. 김육훈과 서희경은 공히 이 선입견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들에 의하면 이미 19세기 말에 민주정치의 개념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군민동치(君民同治, 또는 君民共治)와 입헌군주제의 내용도 얼마간 소개되었다. 다시 말하면 민주공화국의 이념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도입보다 적어도 반세기 이상 소급하는 자생적 기원을 갖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자생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내적 요구에 입각하여 외부세계에서 배웠다는 뜻이지 자기발명적이라는 뜻일 수는 없다.

  김육훈은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란 이름의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던 홍영식의 일화부터 시작하여 갑신정변•갑오개혁과 동학혁명독립협회와 독립신문•삼일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르는 과정을 차례로 점검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입헌정치와 민주주의 사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가령, 저자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머물던 박영효의 상소문(이른바 開化上疏, 1888)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하늘이 인간을 낳았으니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
사람은 누구나 생명을 보존하고,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졌으며, 이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국가는 이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 정부가 이를 저버린다면 인민은 그 정부를 변혁하고 새로 세울 수 있다.(민주, p.45)

  1888년의 문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민주적•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문건의 작성자인 박영효의 행적이 갈수록 어수선해지는 것은 또 다른 해명의 대상이지만, 적어도 1880년대의 시점에서는 그가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급진적 전도사였던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박영효를 비롯한 개혁파들이 왕조의 중심부에서 활약한 지배계급의 일원이었던 데 비해 전봉준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한 민중적 혁명가였다. 저자 김육훈이 농민자치기구로서의 집강소를 주목하고 전봉준을 “인민주권이란 말은 몰랐으나 그 원리를 현실에서 실천했던 인물”(민주, p.58)로 평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사회의 상층부와 기층부에서 맹렬하게 솟아오른 이런 개혁의 움직임을 제압하기 위한 조치가 말하자면 대한제국(1897.10.12)의 선포이고 우리 역사상 최초의 헌법이라는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1899.8.17)의 제정이었다.

  여기서 잠시 대한제국•대한민국의 ‘대한’이 어디서 왔는지 살펴보자. <민주>(p. 66)에는 나라 이름을 ‘대한’으로 정한 연유가 『고종실록』에서 인용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실수다. 고종시대에 관해서는 실록이 없고『승정원일기』가 있는데,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index)의 해당 항목은 황제의 조령(朝令)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서 싣고 있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할되어 각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는 서로 자웅을 겨루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이외에 영토를 더욱 확장하여, …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 1년으로 삼으며…”

  그러니까 대한제국의 명칭에는 삼국통일의 법통 계승, 중국의 종주권 부인 및 황제의 전제권력 강화 등 다양한 포석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물론 ‘대일본제국’이란 명칭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어떻든 ‘대한’이란 이름은 고종의 퇴위와 왕조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고 대한자강회, 대한광복회 등의 명칭을 통해 애국계몽운동 시대의 역사적 기억을 되살리는 역할을 맡았고, 1919년 3,4월에는 ‘대조선공화국’ ‘신한민국’ ‘고려 임시정부’ 등을 누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설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이렇게 주로 해외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대한’이 사용되었으므로 일제강점기 한반도 안에서는 그 말은 위험한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는 수백년 익숙하게 사용해온 ‘조선’이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자명한 기호로 통용되었다. 1948년 6월 제헌과정에서 나라 이름을 정할 때에도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때와 비슷하게 ‘대한민국’은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 ‘한국’ 등과 치열한 경쟁 끝에 표결로 채택되었던 것이다.(민주, p.228)

  민주•평화•통일은 한 몸이다

  <헌법>의 저자 서희경은 이상의 경과를 정치이념의 태동과 정치운동들 간의 경합, 그리고 합의된 이념의 문헌적 표현으로서의 헌법제정을 꼼꼼하게 추적하게 섬세하게 분석한다. 그는 1948년 대한민국 헌법으로 귀결되기까지의 역사적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만민공동회 활동(1898), 삼일운동(1919.3)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4)이라는 세 주요사건을 중심으로 민주공화주의 헌법의 탄생을 검토한다. 저자에 의하면 삼일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은 적어도 이념의 지평에서는 근대 시민혁명과 민족혁명을 겸하는 일대 역사적 전환이었다. 그의 책에서 한 대목 읽어보자.

  1919년의 삼일운동은 민족 내부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차이를 뛰어넘어 참가자들 사이의 수평적인 일체감을 가져왔고, 그것이 국민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나 삼일운동은 민족 외부와의 투쟁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민족 내부의 투쟁이기도 했다. 반제국주의 운동이자 반군주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헌법, p.71)

  또한 삼일운동은 조선의 봉건적 양반(위정척사파), 농민(동학파), 상공인(개화파)으로 분화된 계급적 적대를 민주공화주의에 의해 통합한 것이었다.(헌법, p.81) 그러므로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된 것은(헌법, p.73; 민주, p.118)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실로 수십 년에 걸친 치열한 반봉건반왕조 투쟁의 역사적 소산임을 말해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귀국할 때까지 모두 다섯 차례 개헌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언제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조소앙(趙素昻, 본명은 鏞殷)이었다. 그는 삼균주의의 주창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권력과 재산 및 교육의 평등을 실현함으로써 계급혁명에 의한 민족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요즘 말로 표현해서 경제민주화라고 할 수 있는 평등사상이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뿐 아니라 1948년의 헌법에서도 기본이 된 것은 삼균주의의 영향이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헌법은 “대한민국 건국헌법의 체계 및 용어, 기본원칙, 이념 등과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는 점, 헌법적 연속성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한국 헌법체제의 일종의 원형헌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서희경은 말한다.(헌법, p.110) 그런 점에서 조소앙이야말로 우리 헌법의 아버지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살펴보더라도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이 나라를 지배했던 헌법은 독립투쟁과 건국운동의 전통에 대한 모독이고 유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권력자들은 대한민국 헌정질서의 파괴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김구조소앙 같은 선열들이 쌓은 1백년 역사의 헌법정신을 지키는 일뿐만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를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는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다산포럼, 201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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