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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정치적 냉소 다스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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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08-03 16:54 조회26,2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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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권후보 단일화 시도를 중단하고 대선 후보로 나섰던 1987년, 그를 '행동하는 욕심'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캐치프레이즈인 '행동하는 양심'을 비꼰 표현이었다. 이후 어떤 몇몇 대선 예비주자들은 '대통령병 환자'라는 모멸적인 진단을 받았다. '욕심'과 '대통령병'이라는 표현에는 그들의 권력욕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다.

노무현 발언 계기로 권력욕의 가치판단 변화


세월이 흘렀다. 1, 2년 전부터 문재인 의원이 유력한 야권 대선후보로 떠오르면서 그의 결정적 약점으로 '권력의지의 결여'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대한 강력한 욕망이 없다면 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있어서 문제였던 권력욕이 이젠 없어서 문제가 된 것이다. 이후 대선 출마결심을 굳힌 문재인 의원이 자신의 권력의지를 과시하는 듯한 발언을 종종 해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권력욕에 대한 가치판단의 이 전도(顚倒)에는 정치문화의 변화를 비롯한 많은 요소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공한 것 같다. 그가 대통령이 된 지 1년여가 지난 무렵 내뱉은 "대통령짓 못해먹겠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여기엔 월급쟁이들이 술자리에서 흔히 내뱉는 범속한 자연인의 언어를 일국의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는 문화적 충격도 있었을 것이다.(이런 점 때문에 노무현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더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대통령직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탄핵과 같은 방식으로 해고될지언정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를 내서는 안 될 자리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통령은 하나의 기능이 아니라, 국가의 수많은 기능들을 기능하게 하는 시원적 기능이다. 나아가 그것은 기능들의 가치를 배정하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총체적이며 완전한 오작동이라는 판정이 국민적 수준에서 내려지기 전까지 그가 멈춰서는 안 된다. 이런 인식에는 가부장적 사회문화의 강력한 잔존뿐만 아니라, 대통령 중심제라는 정치체제의 일반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대선 주자들이 권력욕이 있다고 비난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치에 대한 냉소는 논리적으로 반박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것은 정당하기까지 하다. 나는 예술가가 정치를 냉소하지 않을 때 차라리 그를 의심하는 편이다. 온전한 예술가는 전부를 건다. 천재적 능력을 갖췄으나 관객을 웃기기보다 종종 괴롭히기를 택했던 희대의 컬트 코미디언 앤디 카우프만의 일대기를 다룬 '맨 온 더 문 Man on the Moon'(1999, 밀로스 포먼 감독)에서 매니저가 앤디에게 던지는 인상적인 질문이 있다. "넌 누구를 즐겁게 하고 싶은 거지? 관객이야, 아니면 너 자신이야?"


그가 코미디언이었다면 '관객' 혹은 '둘 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앤디의 말해지지 않은 대답은 '나 자신'이다. 이것이 예술가의 태도이다. 그는 균형을 잡는 사람이 아니며, 균형과 절충의 불충분과 기만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정치는 예술이 아니다. 정치가는 문제를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일부라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오류와 기만을 뒤집어쓰는 일이다.

예술가·근본주의자들에게 정치 실패는 부차적


이념적 혹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예술가의 관점을 공유하며 이 때문에 정치에 실패한다. 그들에게 정치의 실패는 부차적인 문제다. 진정한 정치적 냉소주의자도 실은 이와 같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범인으로서의 우리 대부분에게 정치의 정의(定義)는 나와 내 자식이 살아있는 동안이라는 시간적 한정과, 문제의 전부가 아닌 가능한 일부의 해결이라는 제한된 범주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진정한 예술가들과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냉소주의에 종종 이끌린다. 하지만 아무리 더러운 판이라도 선거는 치러져야 하고 권력욕이 가득한 사람 중 하나가 대통령으로 뽑히게 되며, 우리는 그가 작동하는 국가 기능 속에서 5년을 살아야 한다. 이 보잘것없는 세속적 사실로부터 내가 진정 자유롭지 않다면 나는 정치를 냉소할 수 없다고 스스로 타이른다. 
 

허문영 영화의전당 영화처장 영화평론가
(부일시론, 매일신문 2012.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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