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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노 홀리데이'는 반인권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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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3-14 08:58 조회22,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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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때의 일이다. 대통령의 여름휴가 동안 읽을 책의 제목이 보도되었다. 그러자 한편에서 비판이 나왔다. 나라사정이 한시가 급한데 어찌 대통령이 ‘한가하게’ 휴가나 찾고 책이나 읽느냐는 거였다. 나는 그때 혹시 개혁·진보 인사들조차 휴식의 ‘진보적’ 의미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새 대통령이 이른 아침에 회의를 소집해서 공무원들을 닦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머슴이 국민보다 더 자면 안 된다고도 했다. 대통령의 ‘잠 철학’이 이렇게 확고하니 중앙부처, 지자체, 심지어 기업까지 새벽형 인간들이 졸지에 양산될 지경이 되었다. 옛날 새마을운동 노래를 떠올린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

 

새 정부가 열심히 일하겠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자세다. 하지만 그것이 ‘잠 적게 자기’, ‘노 홀리데이’, ‘노 새터데이’ 하는 식으로 빗나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일’과 ‘노동’을 바라보는 근본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른 봐도, 이 문제는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게 가능하냐는 생물학적 차원, 그리고 그것이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세상이 좋을 것인가 하는 가치판단의 차원을 가진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더 나아가 산업사회의 노동현실로부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인간성과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심각한 차원의 질문이 된다. 올해로 선포 60돌을 맞는 세계인권선언의 제24조를 보라. “모든 사람은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길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에는 노동시간을 적절한 수준으로 제한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받을 권리가 포함된다.” 하지만 일중독, 일벌레를 일종의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에서 ‘쉴 권리’ 운운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손가락질받기 딱 좋을 것이다. 악착같이 발버둥쳐도 될까말까 한데 휴식이 인권이라고?

 

그러나 노동과 휴식을 한 쌍의 동일한 가치로 볼 줄 알아야 주말근무, 야근, 비정규직 노동, 출산휴가, 생리휴가 등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할 수 있고, 인간화된 사회를 실현하는 길이 열린다. 아무리 일할 권리가 소중하더라도 쉴 권리가 없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세계인권선언 23조에서 ‘일할 권리’를 규정한 후 바로 다음 조항에서 ‘쉴 권리’를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는 하루 8시간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와 그 궤적을 같이한다. 휴식과 여가를 사치로 여기는 순간 인간은 돈벌이 기계로 전락한다. 휴식은 시장사회의 공세로부터 인간성을 지켜주는 극히 중요한 보호장치다. 만일 ‘무휴일’ 관행이 전체 공직사회로 파급된다면 그것은 공무원에 대한 심대한 인권침해이자 가정파괴의 원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책임감 있게 헌신적으로 일하는 국민의 공복이지, 잠 안 자고 주말에도 쉬지 않는 인간 좀비들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대부·대모였던 레이건과 대처도 주말과 휴가를 철저히 지키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노 홀리데이’는 천민자본주의의 반인권 선언이나 다름없다. 시대착오적이고 유치한 발상이며 지속 불가능한 모델이다. 도대체 이 세상의 어떤 선진국에서 ‘노 홀리데이’를 선언한단 말인가? 제발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선진화’가 세계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준과 합치되길 바란다. 진정한 선진화는 인권을 보호하고 인간성을 존중하는 사회라는 사실, 노동과 휴식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사회라는 사실에 눈뜨려면 우리에게 얼마나 더 긴 시간이 필요할까?

 

조효제/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2008.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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