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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동아시아의 전통학문과 21세기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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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4-27 10:01 조회17,6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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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본 쿄또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역사학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가”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까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물음이라 바로 답을 댈 수 없어 몹시 당혹했었다. 다른 학문 분야의 참석자들도 같은 질문을 받았는데 자신있게 긍정적인 답을 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나는 이 질문이 우리가 소홀히해온 학문의 본질을 묻는 것으로 생각되어, 자신이 수행하는 학문을 돌아보기 위해 그 질문을 되묻고는 할 뿐만 아니라 간혹 다른 분들에게도 물어본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염려하는 소리가 높아지면서, 인문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문학의 가치와 효용에 대한 논의도 무성하다. 그 과정에서 출현한 하나의 지배적인 조류가 인문학을 기초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는 ‘응용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대명사가 문화콘텐츠학일 것이다.

 

 요즈음 일부 대학뿐만 아니라 사회단체까지 나서 CEO를 위한 인문학 강의를 주관하는데,  그 프로그램이 성황인 모양이다. 또한 신문 같은 언론매체에서 유명 경영인들이 인문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는 컬럼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시장에서의 가치로 평가된 인문학의 효용을 발견한 것일까. 그런 경향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만난 경영자들은 인문학 교육을 통해 인간을 폭넓고 속깊게 이해하는 즐거움과 동시에 자기 발견의 즐거움을 맛보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사실, 배우고 익히는 과정의 정서적 측면은 예부터 중시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 지식인 가운데는 『논어』를 다 읽고 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발이 움직여 춤을 출 만큼 기쁨에 겨워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배움을 통해 느끼고 변화되는 것이 진정한 인문학의 공부길이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에서의 인문 교육이 과연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까. 우리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거나 배운 사람 가운데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듯싶다. 특히 입학하자 마자 취직준비를 위해 학점과 ‘스펙’ 관리에 매달리는 학생이나 그런 학생을 상대하며 연구평가지표에 신경이 곤두선 교수에게 이같은 인문학의 역할은 아주 공허한 얘기로 들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취업 준비를 위한 공부를 하더라도 인문학 과목을 이수하면서 그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키우는 교육을 대학에서 받은 경험은 대학생의 대학생활과 졸업 후의 삶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확신한다. 타이완과 홍콩에서 활동하는 여류 문인 롱잉타이(龍應台)는 총통을 여럿 배출한 타이완대학교 법과 대학생들에게 한 강연에서 좋은 정치가라면 권모술수가가 아닌 인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그런 인물의 자질을 연못가에 서 있는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물위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까지 볼 수 있는 능력,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능력이라고 풀이한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어찌 보면 새롭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그런 인문학 교육을 현존 교육제도에서 제공하고 있는가이다.

 

 사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발원해 근대 일본을 거처 우리에게 전해진 근대 인문학의 분과학문은 제도적으로 전문적 기능인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안에서 인간성을 널리 이해하는 즐거움과 동시에 자기 발견의 즐거움을 맛보기란 상당히 힘들어져 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사람들은 그런 인문학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갖고 있고, 대학이란 제도 밖에서 ‘대안적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그런 기대를 일부나마 충족시켜 주는 교육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우리 대학에서는 오늘도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기존의 분과학문 체계에 의한 학과제도로 돌아가야 인문학이 산다든가, 아니면 통합제도를 시행해야 한다든가 하는 제도에 대한 논의만 되풀이된다. 물론 제도적 논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근대인문학의 이념이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생략한 채 제도 개혁을 논의하는 것은 관련 당사자들의 이해관계 조정으로 귀결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인문학에 대한 성찰은 본래 이념인 인간다운 삶의 고양을 충실히 하는 총체성 학문이란 점을 확실히 깨닫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하여 학문의 분화가 심화되는 현실에 맞서 파편적인 지식을 종합하고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와 감각을 길러주며 현재의 ‘삶에 대한 비평’(criticism of life)의 역할을 하는 인문학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자연과학과 분리되고 이어서 사회과학과도 결별하고 남은 근대인문학에 머물러 그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쓴다면 선택의 길은 위태롭다. 비판적 사고와 상상력을 강조한다 해도 그것이 딱히 인문학에서만 습득될 수 있는지, 또 고전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을 중시한다 해도 고전의 가치를 때로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고전에 담긴 인문정신을 되살리면 모든 현재의 문제가 해결될 듯 주장하는 ‘인문 권위주의’로 미끄러질 위험은 없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동아시아 전통 속의 유교적 학문관(즉 修己治人)을 돌아보며, 학습이나 연구 과정의 정서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배우는 사람도 가르치는 사람도 그 수행 과정에서 느끼고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물론 그 같은 인문주의적 전통은 여가를 지닌 사람들, 곧 어떤 점에서 특권을 향유한 계급(士大夫)의 교양이었음은 분명한데, 사실 이것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러한 특권을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계층으로까지 확대시키려 애쓰는 가운데 인문학이 오늘날까지 그나마 발전해왔음을 확인한다면, 21세기 새로운 인문학의 방향은 이미 제시된 셈이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통신. 2009.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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