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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盧 떠난 자리, 우리가 채워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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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6-01 08:17 조회18,3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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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동엽은 자신이 꿈꾸는 정치적 유토피아를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시민들 위에 있기보다 그 옆에 선 친구이기를 원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에야 비로소 신동엽이 꿈꾼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봉하마을 점빵에서 담배를 피우고, 손녀를 손수레에 실어 자전거로 끌고, 동네 사람들과 농사를 짓고, 방문한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그는 출발점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의 주기를 시작하고자 했고, 공동체를 만들고 생업을 일구는 ‘완전히 다른’ 정치를 시작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새로운 실험은 싹도 내밀기 전에 짓밟혔고, 더불어 그가 구현한 신동엽의 풍경도 너무도 짧게 스러져버렸다.

생각해보면 그는 사자의 ‘용맹함’을 갖추었던 지도자였다. 그 용맹함은 원칙을 심지로 활활 타오르는 것이어서 그를 사랑하는 자들을 뜨거운 열정으로 이끄는 힘을 가졌지만, 그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진정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청산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땅에서 반칙을 일삼고 특권 위에 올라타 있는 기회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반칙과 특권 없는 새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기에는 여우의 ‘교활함’이 모자랐던 것같다. 예컨대 그는 스스로 그렇게 열렬히 소망했던 정치개혁과 언론개혁을 위해서는 오히려 경제개혁과 분배개혁을 통한 세력연합의 공고화라는 에움길을 잰 걸음으로 걸어가야 함을 미처 생각지 못했고,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을 위해 기울인 지극한 노력이 도리어 부동산 거품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음을 통찰하지 못했고, 검찰을 개혁하기 전에 그들에게 먼저 자율성을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반칙을 없애기 위해서 반칙을 저지를 생각이 없었으니 그 만큼 정치적 운산은 더 깊고 지혜로운 것이어야 했지만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로 인해 그는 하이에나 같은 수구 세력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며 이리저리 떠밀리고 상처를 입었고, 퇴임 후에는 친구와 동지와 가족이 물어뜯기는 것을 봐야 했다. 그 자신이 도덕의 기준을 높이고자 했기에 그것이 작은 허물이라 할 수 없지만, 현정부의 공격은 덫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도리어 피붙이와 동지와 친구를 사지로 내몰게 만드는 표독한 것이었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하이에나들에게 마지막 살 한 점까지 낱낱이 뜯기는 것만은 거부했고, 그렇게 사자의 존엄함을 지켰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용맹한 사자의 마음 속이 한없이 여리고 따뜻했다는 것을, 매일 타협하고 포기하고 염치없이 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리 되고 싶은 염결성을 그가 보여주었다는 것을, 한동안 잊었지만 우리가 그로 인해 그리고 그와 더불어 꿈꾸었던 바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패배가 우리의 패배임에 불구하고 부당하게 상처받고 있는 그를 수수방관했다는 것을... 그토록 길고 열렬한 추모행렬에 흐르는 서러움과 자책과 분노의 감정이란 그런 깨달음 외에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 깨달음에 보태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한계는 실은 우리의 한계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용맹함에 있어 우리는 그보다 못했고, 그의 지략을 보충하기에 우리의 능력과 균형감각이 모자랐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의 용맹함을 우리 것으로 하되 모자랐던 여우의 교활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를 죽음으로 몬 수구세력들은 반칙에 꺼림이 없고 집요하고 억센 턱과 이빨을 가졌다. 더 많은 돈과 권력과 네트웍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들을 딛고 넘어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여우인 사자, 사자인 여우가 되어야 한다. 그의 묘지 위에 태양은 붉게 타오를 것이다. 허나 한낮의 찌는 더위는 우리의 시련으로 남아 있다. 서러움을 버리고 용맹함에 교활함을 더해 나아가야 한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

(경향신문. 20009.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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