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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패자전몰’ 민주주의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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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6-05 08:01 조회18,2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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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민주주의의 구현은 불가능하다. ‘주인’인 시민의 뜻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들의 뜻이 서로 다른데 ‘대리인’인 정부가 누구의 뜻을 따를 수 있겠는가. 할 수 없이 고안한 것이 정당을 매개로 하는 대의제다. 다종다양한 시민사회의 선호와 이익을 복수 정당들로 하여금 분담하여 대변케 하고 정당 정치인들이 선거 경쟁을 거쳐 정부를 구성할 때 그 정부 결정을 일반 시민의 뜻으로 인정하자는 일종의 사회계약을 제도화한 것이다. 이 대의제 민주주의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다수제고, 다른 하나는 합의제다.


 

다수제 민주주의는 영국인들이 설계했다.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와 같은 다수제 혹은 다수결형 선거제도를 통해 의회의 다수당 지위를 차지한 특정 정당에 정치권력을 몰아주는 제도다. 단일 정당이 입법부와 행정부를 모두 장악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이므로 여기서의 정부는 임기동안 효율적인 국정 운영을 지속해갈 수 있다. 시민의 뜻을 해석하고 구현해가는 권력을 다수당이 독점적으로 행사하도록 한 것이다. 한편 패배한 정당과 그 정당이 대변하는 사회세력들은 이 권력에 참여하지 못한다. 승자독식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유다.

정치보복 반복되는 ‘승자독식’

우리나라는 이 다수제 민주주의를 미국을 통해 수입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인들이 수정을 가한 부분, 즉 행정부 형태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꾼 방식은 그대로 들여왔으나 대통령으로의 권력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삼권분립 제도 등은 제대로 수용하질 못했다. 결과는 다수제 민주주의의 특징인 승자독식-패자전몰 현상이 정당만이 아니라 지도자 개인 차원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고착이었다. 극단적 사례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이 패자전몰 민주주의의 비극으로 볼 수 있다.

패자는 권력과 권한은 물론 명예와 자존심, 그리고 목숨마저도 내놔야 하는 이런 식의 민주주의가 과연 타당한 것인가. 여론조사 등을 통해 나타나듯, 국민의 다수가 노 전 대통령 서거는 정치보복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설마 이 정도로 야만적이진 않겠지만, 정권교체 후의 정치보복은 앞으로도 되풀이될 수 있다. 그 경우 사회분열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다. 이제 한국식 다수제에 손질을 가할 때가 아니겠는가.

‘유러피언 드림’을 꿔보자.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선진국들은 다수제가 아닌 합의제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다. 합의제의 핵심 제도는 국회 의석을 정당 득표율에 비례하여 각 정당에 배분하는 비례대표제다. 여기서는 지역이나 인물이 아닌 정책과 이념 중심의 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다당제가 발전한다. 유력정당의 수는 통상 셋 이상이게 마련이므로 단일 정당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따라서 행정부의 일반 형태는 연립정부이며 시민의 뜻은 정당들 간의 합의에 의해 해석되고 구현돼간다. 권력은 당연히 분산되고 공유된다. 승자와 패자가 적대적일 이유도 없다. 패자라도 상당한 영향력 행사가 가능할 뿐더러, 오늘의 경쟁자가 내일의 연정 파트너가 될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부터 우선 도입을

우리나라에서도 권력분산형 의원내각제로의 전환 필요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거론돼왔다. 무엇보다 반대자들은 물론 심지어 지지자들의 선호마저도 무시하는 행정부의 독선적 국정 운영 행태가 자주 목격됐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전근대적 정당정치 수준에서 당장 의원내각제로 갈 수는 없다. 그러나 선거제도 개혁은 한시가 급한 과제다. 경제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다수제 선거제도를 택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 대여섯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비례대표제 혹은 비례성이 상당히 보장되는 혼합형 선거제도를 택하고 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우리도 비례대표제의 전면 도입 등으로 지역주의 청산이나 이념 및 정책에 기초한 정당정치 활성화 등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 조건을 미리 갖춰놔야 한다. 의원내각제는 그 후의 목표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경향신문. 2009.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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