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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민주화 이후의 권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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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0-13 20:00 조회23,1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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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대를 했던 것은 1988년이었는데, 87년 민주화 이행 후 군대에도 민주화 바람이 조금씩 불던 때였다. 대표적인 것이 기합이나 체벌이 엄격히 금지되고 얼차려가 도입된 것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전후 맥락까지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시절에 본 인상적인 풍경이 하나 있다. 전방 부대의 한 내무반에 좋지 못한 일이 발생했고, 그래서 상병들이 일병과 이병을 저녁 식사 후에 집합시켰다. 상병들은 일병과 이병들의 웃통을 벗게 했다. 초겨울의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 상병은 물 한 사발을 들고 일병과 이병들 앞을 오가며 그들의 벗은 몸에 손가락으로 물을 퉁겼다. 찬 밤바람 속에서 몸에 묻은 물이 피부의 체온을 빼앗아 증발할 때 밀려올 한기는 보는 사람마저 오싹하게 했다. 하지만 더 오싹한 것은 상병의 말이었다. “군대도 민주화되었다며… 그래서 때리면 안 된다며…” 그 장면이 오래 머리에 남았던 것은, 민주화는 새로운 법과 규정을 도입하지만 권위주의적 관행과 습벽은 새로운 법과 규정 속에서도 기생할 수 있다는 것, 민주화가 권위주의를 추방하지 못하고 그것을 변형하는 데 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명박 정부는 그때 그 상병의 모습을 닮았다. 법과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경유하여 권위주의적 통치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아래서 사람들은 예전처럼 보안사나 국정원 공안분실에 끌려가서 고문당하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이명박 정부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통치한다. 대신 이명박 정부는 의당 법을 감싸고 있어야 할 상식과 규범과 여론으로부터 법을 빼내어 그것을 잘 벼린 단검으로 만들었다. 법이나 규정의 적용 대상과 적용 방식의 극단적 선택성으로 인해 법과 규정 자체가 기괴해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사법처리한 촛불집회 참여자가 1649명이다. 불법시위 단체로 통보된 단체가 1840여개이며, 이들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피디수첩’에 대해 집요한 수사와 기소가 이뤄졌고, 신태섭 교수는 해임되었고, 박원순 변호사에 대해서는 정부에 의해 명예훼손 소송이 청구됐다. 진중권 교수는 강의를 박탈당했고, 윤도현씨나 김제동씨는 맡고 있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잃었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이 국가의 학술지원사업에서 은밀히 배제되고 있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이 모든 것이 법과 규정 외부에 있지 않다. 중앙대나 <한국방송>(KBS)은 자신이 가진 권한을 규정의 범위 안에서 행사한 것일 뿐이며, 이 점은 검찰이나 민사소송을 제기한 정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검찰이나 민사 소송을 제기한 정부의 모습을 보면, 이들이 정말로 대상자들의 유죄를 확신하거나 배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 같지 않다. 의도한 바는 오히려 재판의 결과가 아니라 대상자들을 재판 과정 속으로 밀어 넣는 것 자체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조서를 쓰게 하고, 주변 사람들과 대책을 논의하게 하고, 재판에 참석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삶 안에 법적 과정이 개입해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들의 시간을 소모하고 경제적 압박에 처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셈이다. 재판의 결과는 아무래도 좋으며, 항소의 목적도 다만 재판을 연장하는 수단일 뿐이다. 법적 과정이 과오에 대한 징벌의 형태를 취하지만 실제 효과는 정부에 대한 도전의 예방조처로 전환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엄격한 법과 추한 관행 사이의 오래된 분리가 극복되는데, 그 극복의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법에 의해 제어된 관행이 아니라 추악한 관행에 의해 정복당하여 추해진 법과 규정들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09.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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