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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식] 뤼순에서 본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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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0 17:49 조회19,6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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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갇혔던 뤼순(旅順)감옥의 옥방(獄房)에 도착했다. 하얼빈 (哈爾濱)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따렌(大連)에 온 우리 일행이 뤼순감옥을 찾은 것은 10월 25일. 원래는 그 다음날, 그러니까 거사일인 10월 26일에 참배할 예정이었으나 변경되었다. 중국 당국이 100주년 행사를 제한하는 바람에 여러 모로 굴절된 모양이다. 구내에 새로 마련된, 안중근․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榮) 등 이 감옥과 유관한 한국의 항일혁명가들을 기리는 기념관의 개관식이 전면 취소되고, 대신 10월 25일에 기념관을 일시적으로 개방하게 된 것이다. 바다를 건너 랴오둥(遼東)에 이르는 여정의 순조로움을 기원하는 산둥(山東) 이주민들의 간절한 뜻을 담아 지어진 뤼순이란 이름과 달리, 안중근 의사를 만나는 뤼순의 여정은 예나 이제나 순하지 않은데, 안 의사의 옥방 앞에는, 1998년에 복원된 건물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인파가 끓는다.     

 

  그 옥방은 고독했다. 좌우 양편에 옥방들이 나란히 이어진 옥사가 아니라, 옥사와 옥사 사이에 낀 3평 남짓한, 번호도 없는 독채 옥방이었다. 그 방에 바로 붙여서 간수부장 즈빤스(値班室: 당직실)가 자리한 것을 보면, 최고의 국사범으로 대우한 저간의 사정이 그 공간배치에서도 역연하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두에서,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Kokopchev)와 회담하러 온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체포된 그는 11월 1일, 동지 9인과 함께 12명의 일본헌병에 의해 호송마차로 압송되어 창춘(長春)을 거쳐 11월 3일,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또오는 왜 러시아 식민도시 하얼빈을 방문했는가? 양국이 '만주'를 대등하게 분할하는 동시에,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하고 일본은 러시아의 외몽골에 대한 특수이익을 보장하는 밀거래 때문이었다. 러일전쟁(1904~05)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두 나라가 전후에는 '만주' 개방을 요구하는 미영의 위협에 맞서 오히려 합작하는 형세를 생각하면 국가이성의 냉엄함이 끔찍한바 없지 않다. 이또오가 숨을 거둔 날이 또한 70년 뒤 박정희(朴正熙)가 암살된 날이기도 하다는 점이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인데, 이듬해 3월 26일 처형될 때까지 4개월 23일간 기거한 이 옥방 앞에서 나는 잠시 이 고매한 영혼의 천도(薦度)를 묵상하였다.

 

  창틀 사이로 아담한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저 책상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처형되는 날까지 다듬었던 미완의 산문「동양평화론」이 태어났구나, 생각하니 눈길의 유정함을 어찌하지 못하겠다. 이 두 산문, 특히 후자가 발굴됨으로써 안중근은 일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동아시아공동체론을 제창한 사상가로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축으로 일본이 회심(回心)하고 중국이 호응하면서 도래할 동아시아공동체 속에서의 평화를 꿈꿨던 그는 정녕 고상한 이상주의자였다. 그런데 안중근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결정적 문헌으로 될 이 두 글이 일본인들에 의해, 전자는 78년에, 후자는 79년에 발견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전자는 "일본의 한 고미술상이 조선총독부 소속 경찰 가족이 가지고 있던 것을 사, 78년 한국 정부에 기증"함으로써, 그리고 후자는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잠자고 있던 것을 안중근 연구가 이치카와 마사아키(市川正明) 이오모리(靑森)대 교수가 찾아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오태규, 「미완의 동양평화론」, 『한겨레』 2009.10.28)던 것이다.

 

  옥방을 지나 사형장을 보고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 침략 유물전'을 살피노라 시간을 지체해 일행과 떨어진 우리는, 박명규 교수의 눈썰미가 아니었다면, 자칫 문제의 기념관을 지나칠 뻔했다. 이 감옥에 유수(幽囚)된 한국의 혁명가들을 기리는 기념관을 중국은 이처럼 잘 만들어 놓고도 왜 관람을 제한하려 하는 걸까? 추모를 빌미로 한국민족주의가 발흥할까봐 지레 우려하는 중국의 옹졸함도 문제지만, 불필요하게 중국을 자극하는 한국민족주의의 과잉도 부담이다. 애국자들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도 민족주의를 넘어설 필요가 절실한데, 특히 안중근에게 민족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동양평화로 가는 방편일 뿐이다. 청의 군항으로 시작하여(1880), 러시아에 조차(租借)되고(1898), 러일전쟁 후 일본의 식민지 기지로 변신했다가(1904), 1945년 소련에 의해 해방된 뒤 다시 중국의 군항으로 돌아온 뤼순, 평소에는 외국인에게 출입도 자유롭지 않은 이 군사도시에서 나는 다시금 그의 '동양평화론'이 사무친다. 그리하여 만세삼창을 하고 뤼순감옥을 떠나며 새삼 쑨 원(孫文)의 시를 음미하던 것이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일세              功蓋三韓名萬國

   살아서는 백세가 아니지만 죽어서는 천추로다    生無百歲死千秋

   약한 나라의 죄인과 강한 나라의 수상           弱國罪人强國相

   처지를 바꾼다면 이또오 후작 또한 그러했으리   縱然易地亦藤侯

 

최원식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서남포럼 운영위원장)

(서남통신. 2009.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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