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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욱] 일본형 조합주의 복지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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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0-12-14 19:30 조회18,4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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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정치제도 조건을 볼 때 일본이 보편적 복지국가로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지금까지 5회에 걸쳐 진행한 논의의 결론이다. 주지하듯, 특히 2000년대에 들어 일본 사회의 복지 수요는 크게 늘고 복지 확충 요구도 상당히 거세졌다. 2009년에 정권을 잡은 하토야마의 민주당은 그에 호응하여 마치 일본을 보편적 복지국가로 만들어갈 듯이 대담한 복지 정책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후임 간 수상은 국가복지의 증대를 위한 증세의 불가피성을 호소했으나 대다수 시민들은 그것을 외면했고, 결국 민주당의 보편주의 복지 구상은 축소되어가고 있다.

 

일반시민들의 적극적 협조가 없는 한 민주당이 복지국가 건설에 총력을 기울일 인센티브는 별로 없다. 민주당은 어차피 인중정당일 뿐 일본 사회의 친복지세력을 대표하는 이념이나 정책 정당도 아니지 않는가. 그것은 자민당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두 거대 정당이 번갈아가며 정권을 독식할 일본의 정치구조 하에서는 앞으로도 보편적 복지국가의 형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혹시 가능성이 생긴다면 그것은 일본 시민사회 전체의 국가복지 확대 요구가 가히 시민혁명에 필적할 만큼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경우에 한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어디 쉽게 일어나겠는가.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시장에 맡겨 놓아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거세진 복지에 대한 사회적 수요와 요구를 앞으로 무엇으로 공급하고 어떻게 채워갈 것인가. 하나의 가능성은 과거 자민당 정부가 1990년대 이후 추진했던 소위 ‘복지다원주의’ 정책을 계승․발전시켜가는 것일 게다. 즉 (국가복지가 아닌) 준공공복지의 영역을 계속 확대하여 사회복지 서비스의 제공자나 관리자를 다원화하는 방식으로 복지수요를 충당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준공공복지의 확대는 주로 기업의 법정복지 비용의 증대와 민간비영리단체(NPO) 복지의 확산을 의미한다. 전자의 경우에서는 민간 기업이 복지 재원의 출처이고 정부가 복지의 관리 및 제공 주체가 된다. 반대로 후자의 경우는 민간기구인 각종 NPO가 복지공급의 주체가 되고 정부는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형태이다.

 

지난 2회에서 본 바와 같이 1970년대와 80년대에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던 일본형 복지사회의 근간은 기업복지였다. 당시 일본은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누리고 있었다. 따라서 고용 자체가 생활보장을 의미할 정도로 기업복지가 발달하면 별도의 사회보험이나 국가복지는 크게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기조가 강해진 1990년대 이후 이 상황은 많이 바뀌었으나 일본 복지체제에서 차지하는 기업의 비중은 여전히 상당했다. 따라서 법정복지의 증대를 통해 기존의 이 기업복지체계를 강화하고 그것으로 복지수요의 상당 분을 감당케 하려는 자민당 정부의 정책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법정복지 증대 여부와 관계없이 기업복지 그 자체의 수혜자가 되기 어려운 실업자나 비정규 노동자의 수가 이미 상당한 규모에 달한 것이 일본의 현 상황이다. 따라서 지금은 특히 NPO 복지체제의 확충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 체제에서 국가는 복지서비스의 공급자라기보다는 주요한 재원조달자로서 혹은 사회적 관리자로서 기능한다. 직접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생활협동조합, 농업협동조합, 중소기업근로자복지서비스센터, 복지공사, 사회복지시설, 주민단체 등과 같이 주로 지역에 기반을 둔 제반 민간단체에 재정, 세제, 행정 등의 지원을 함으로써 이들 지역기반 NPO들의 복지 역할 강화를 측면에서 돕는 것이다. 비록 사회복지나 노동복지의 직접적 제공자는 아니지만 국가는 잔여적 역할 이상의 것을 맡고 있는 셈이다.

 

기업의 법정복지 증대와 NPO 복지체제의 강화는 종국에 또 하나의 가능성인 일본형 ‘조합주의 보수주의’(corporatist conservative, 이하 ‘조합주의’) 복지체제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조합주의 복지체제란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에서 발전한 것으로서 사회보장제도가 주로 (개인보험이나 국가보험이 아닌) 사회보험 형태로 체계화되어 각종 사회보험의 가입자인 기업이나 조합의 구성원 및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복지 수혜집단이 형성되는 체제를 말한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가입할 수 있는 사회보험이 도처에 산재해있는 까닭에 이 체제는 사실상 많은 복지 영역에서 보편주의에 가까운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들이 가입할 수 있는 사회보험의 양과 질에 따라 각자가 누릴 수 있는 사회보장 정도가 다르며, 따라서 시민들 즉 복지수혜자들 간에 일정 정도의 사회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다만 국가가 나서서 소위 보조적(subsidiary) 역할을 적극 수행한다면 이 복지 격차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

 

국가가 기업의 법정복지를 지속적으로 증대케 하여 그것을 주체적으로 관리하고 복지 관련 조합들의 확산과 그들의 재정 확보 노력을 적극 지원 하는 것 역시 상당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그 비용은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에 소요되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저렴한 것일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체제는 점진적, 단계적으로 완성해갈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공공사회지출 증가 폭을 감안하면 일본형 조합주의 복지체제는 아주 멀지 않은 미래에 나름 그 골격을 갖출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참고로, 일본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비중은 1990년 11%, 1995년 14%, 2000년 16%, 2005년 19% 등으로 지속적으로 증대해왔고, 2010년 현재는 20%를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것은 GDP의 25%에서 29% 사이를 사회지출비용으로 쓰고 있는 독일, 프랑스, 이태리 등의 선진 조합주의 복지국가들과 비교할 때는 여전히 낮은 수치이지만 국가복지의 확대를 추진하기 시작한 20년 전에 비하면 무려 두 배 가량 증가한 것이다. 이 속도로 10년만 더 간다면 선진 조합주의 복지국가들의 수준에 다다를 것은 거의 명백한 일이다.

 

아마도 이렇게 형성해가는 조합주의 복지체제가 주어진 정치제도 조건 하에서 일본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복지체제일 것이다. 물론 그것도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희망은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의 승자독식형 정치제도는 일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비타협적이고 상호배제적이며 대립적인 정치문화를 형성·유지케 해온 주범이다. 그것이 개혁되지 않는 한 한국의 복지체제가 나름의 방식에 의해 일정 정도의 보편성을 띤 선진체제로 발전해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여전히 OECD 최저인 8%대에 불과한 한국의 GDP 대비 공공사회지출 비중은 그 비관적 전망을 뒷받침하고 있다.

 

최태욱(한림국제대학원대)
(서남포럼. 2010.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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