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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홀로코스트가 남긴 숙제 ‘인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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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4-23 11:06 조회31,5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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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 아돌프 아이히만, 당신은 아돌프 카를 아이히만의 아들 아돌프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피고인: (기립한 채) 예.

재판장: 본 재판의 변호인이 로베르트 세르바티우스 박사와 디터 베크텐부르크가 맞습니까?

피고인: 예.

재판장: 당신은 15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본 법정에 섰습니다. 지금부터 기소장을 낭독하겠습니다.

 

정확히 반세기 전인 1961년 4월11일, 나치 전범이자 ‘유대인 최종해법’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요즘 전세계 홀로코스트 학계는 이 재판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예루살렘 재판은 처음부터 ‘세기의 재판’으로 불렸고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재판의 전체 속기록이 인터넷 문서보관소에 올라와 있으므로 누구든 전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www.nizkor.org)

벤구리온 총리의 의도는 처음부터 명백했다. 재판이 한 개인의 처벌을 넘어 홀로코스트 전체를 응징하는 역사적 교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류 증거물뿐만 아니라 수많은 피해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채택되었다. “형언할 수 없는 인간재난을 불의 언어로써 말하게끔” 하려는 취지였다. 심지어 옛 나치들의 증언도 수집하였다. 수용소에서 400만, 즉결처형·아사 200만, 모두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됐다는 통계가 애초 아이히만의 ‘자랑’을 통해 나왔다는 증언도 이렇게 해서 확보되었다. 아이히만이 요구한 독일인 변호사가 이스라엘 국내법정에 설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그 수임료까지 정부가 지불하였다. 아이히만의 죄목은 1950년에 제정된 ‘나치 및 그 부역자 처벌법’에 근거했는데 수많은 유대인의 추방과 학살뿐 아니라 폴란드인, 슬로베니아인, 집시족, 체코 어린이들을 박해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중 하나”였음을 인정하고 인간적으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법적으로는 무죄라고 강변하였다.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한 일개 ‘교통경찰’에 불과했다는 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해 연말 사형이 언도되었다. 1962년 5월31일 밤 교수형이 집행된 후 그의 유해는 즉시 화장되었고 해군 경비선이 그 재를 지중해의 공해상에 뿌림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스라엘 민간재판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형이었다. 사형집행 전 아이히만의 부인으로부터 선처를 요망하는 편지를 받은 이츠하크 벤즈비 대통령은 거절 회신을 보내면서 성경의 사무엘기 상권 15장에 나오는 구절을 육필로 적어 보냈다고 한다. “너의 칼이 뭇 여인을 자식 없게 만들었으니, 네 어미도 여인들 가운데에서 자식 없이 지내야 마땅하니라.”

아이히만 재판은 오늘날 국제적 대세로 자리잡은 과거사청산 작업의 한 전형이 되었다. 또한 아데나워가 총리로 있던 서독에서는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한스 글롭케 같은 구 나치들의 문제가 불거질까봐 극도로 긴장하였고, 소련권에서 서독이 나치 독일을 계승한 파쇼정권이라고 선전할 것을 우려하였다. 재판 이후 나치 전범들의 검거율이 갑자기 늘어났고 외국에 대한 범죄자 인도 요청도 대폭 증가하였다. 이스라엘 국내에 미친 파장은 더 컸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전후 이스라엘로 귀향한 유럽의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 경험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 속에 살았다. 게다가 “도살장으로 끌려간 양 떼”처럼 고분고분하게 나치의 희생물이 되어주었다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재판 이후 홀로코스트 사건을 국민적 정체성의 핵심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기풍이 형성되었다. 올해부터 이스라엘의 고등학교 역사수업에 홀로코스트 교육이 필수항목으로 포함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홀로코스트 이야기를 할 때 이스라엘이 현재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가하는 차별과 폭력, 그리고 그런 현상에 대해 이스라엘인들의 일반적인 문제의식 결여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혹시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떤 특권적 지위로 여기거나 그것의 의미를 자기중심적으로 독점하려고 한 경향이 이러한 모순의 씨앗을 잉태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아이히만 재판을 거론하면서 한나 아렌트를 빼놓을 수 없다. 예루살렘 재판에 관한 우리 인식의 거의 대부분이 그녀의 시각을 통해 일차적으로 프레임되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진부한 인간형에서 악이 발현될 수 있다고 한 아렌트의 주장을 어느 선까지 받아들일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탁상 살인자 아이히만>을 쓴 역사학자 데이비드 세자라니는 아이히만이 아렌트의 묘사보다 훨씬 더 확신에 찬 반유대주의자였음을 지적한다. 필자 역시 무관심, 진부함, 범용함만으로 악을 설명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자신을 평균적 도덕률을 지닌 정상인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아이히만이 평범했을지 몰라도, 그가 반인종주의의 과업에 쏟았던 열정은 상상을 넘는 수준이었다. 전쟁 말기에 나치 친위대의 상관이던 히틀러가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자 그의 명령을 무시하면서까지 유대인 강제이송을 계속 추진할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보통사람들이 평범하게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이히만은 공격적으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파괴적 평범성’이 그의 죄과를 아주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던 게 아닐까.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살인적인 경쟁으로 성적 올리기에만 급급하고 아이들의 사회성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은 외면해 버리는 교육현실이 미래의 잠재적인 악을 키우고 있지나 않은지, 아이히만 재판을 반추하면서 성찰해야 할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조효제/성공회대학 교수

(한겨레. 201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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