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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우리는 문명의 임계점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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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8-11 11:28 조회18,3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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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1일 일본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나는 홋까이도(北海道)에 회의 참석차 가 있었다. 그날부터 나흘간 그곳에 머물며 사태의 추이를 가까이서 경험했기에 일본인의 재난에 대한 반응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지금 방사능에 대한 우려와 전력의 제한송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인들이 전력 수요가 피크에 달하는 이 여름을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앞으로 일본의 향배를 가늠하는 고비가 될 것이란 전망도 들린다. 그런데 관동권(關東圈)에서 400만명의 사람들이 피폭된 이 놀라운 현실을 보면서, 2년 전 들러본 미나마따시(水俣市)의 환경운동가들이 세운 역사고증관에 걸린 설명문이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미나마따 출신과 결혼을 꺼린다는 글귀이다. 인근 신일본질소공장에서 유출한 수은에 중독된 어패류를 먹은 사람들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한 이른바 미나마따병의 피해를 입은 이곳 주민들은 긴 재판 끝에 보상을 받았고 피해 발생으로부터 50 여년이 지난 지금 그 지역이 이제 대표적인 환경마을로 바뀌어 나 같은 외국인도 견학할 정도로 재해가 극복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는 후유증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재난이 극복된 뒤에도 상당 기간 그 지역 주민들 역시 차별과 배제를 겪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니, 마음이 아주 무겁다.

 

바로 이 점을 토미야마 이찌로오(富山一郞) 교수가 지난 6월 2일과 3일 이틀간 열린 국제회의(연세대 국학연구원 인문한국사업단 주최)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지금 “일본, 칸바레(힘내라)!”라는 구호로 압축된 복구와 재건의 열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흐름이 섞여 있다고 한다. 하나는 군국주의적으로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어떤 희생을 무릅써서라도 재난을 극복하여 이전의 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급적 인명 피해를 줄이면서 일본을 복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는 토오후꾸(東北)지역 피해자들의 처지를 일차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맹점이 있다고 그는 비판하였다.

 

예상 못한 충격적 재난을 겪은 일본에서는 지금 새로운 일본의 재생을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여름철 잡지 광고들만 봐도 다양한 진단과 처방이 나오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원전 처리 문제를 넘어서 ‘재탄생’인가 ‘추락’인가의 기로에 섰다는 각오 아래 일본을 개조할 역동적인 리더쉽을 요구하는 소리도 일찍부터 나온 바 있다. 그런데 내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일본 사회 저변의 움직임이다.

 

『겐다이시소』(現代思想) 전 편집장인 이께가미 요시히꼬(池上善彦)가 이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주었다. 중국 상하이대학에서 열린 ‘2011년 동아시아 비판잡지 워크숍’(6월 17-18일)에서 그는 일본에서 원전과 방사능에 대한 학습이 민중적 규모로 시작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것을 단순한 지식욕이 아니라 ‘생존을 건 학습’이라고 말했다. 민중들 스스로 과학적으로 각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존을 건 학습’이란 말을 들을 때 내 마음에 강한 울림이 일렁였다. 그것이야말로 온몸으로 실감하는 대안적 지식·학문으로의 질적 전환의 임계점을 의미하는 신호음 같아서였다. 사실, 미국에 패배한 1945년의 패전에 이어 자연에 패배한 ‘두번째 패전’으로까지 비유되는 ‘3·11대재난’은 문명의 전환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전기의 대량 소비를 야기하는 문명에 대한 성찰의 필요를 촉구하는 소리가 높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좀더 깊이 궁구해야 할 대목이 있다. 자칫하면 탈원전 운동이 자연회귀의 근본주의로 치달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경계하는 강상중 교수는 최근 한 대담에서 자신은 기본적으로 탈원전을 지지하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리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일종의 ‘업’이랄까 ‘원죄’ 같은 것이므로 자연회귀를 슬로건으로 해서는 안되고, 자연을 어떻게 문명 속에 끌어들일까, 뒤집어 말하면 이제까지의 문명의 존재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週刊讀書人』, 2011년 7월 1일자 대담)

 

나는 그의 입장에 동조하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안하고 싶다. 문명의 전환 같은 장기목표를 현실 속에서 추구해나갈 중·단기 전략을 동시에 사고하면서 그것을 일관된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작업이 관건이라고 강조하려는 것이다. 특히 문명과 같은 장기 과제와 일상적인 단기 과제를 연결시키는 매개항인 중기과제를 누락시킬 때 불가피하게 관념화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기존국가 해체전략이자 한결 개방적이며 민주적인 국가기구의 창안작업이 종요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중기 과제를 수행해 가는 추동력은 우리가 삶의 현장 곳곳에서 지금의 문명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공통감각을 갖는 데서 생긴다. 여기서 말하는 공통감각은 단순히 개인의 감성 차원에서 오감(五感)에 공통하는 감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시적(共時的)인 공간세계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통시적(通時的) 시간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타자와 함께 느끼는 감각이다. 리얼한 의미에서 ‘공통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초월한 것이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를 움직이는 힘이 될 것이다.

 

중국의 쑨꺼(孫歌)교수가 “사회의 공통인식을 확립하여 다른 각도에서 소비와 절약의 관계를 다시 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가”가 호소한 것도 같은 취지일 것이 분명하다.(『圖書新聞』, 2011년 5월 21일자) 이미 동아시아에서 공통감각은 조금씩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백영서 연세대 교수

(서남통신 201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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