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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기형적 민주주의 속 진화하는 러시아 시민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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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11-09 13:26 조회19,1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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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이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 해체된 지 20년이 된다. 1991년 여름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크리미아 반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국가보안위원회(KGB) 간부들과 고위 장성들이 작당하여 소련의 수명을 연장시키려 했던 시도는 삼일천하로 끝났지만 역설적으로 제국의 붕괴를 재촉했다. 그해 말 소련은 지상에서 사라졌고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연방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세기의 대사건이었던 동구권 변혁의 긴 여정이 마무리된 순간이었다. 통독 20주년의 풍경도 베를린 현장에서 지켜본 터라 최근 모스크바의 학술대회에 참석한 김에 지난 20년 세월이 러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침 필자가 속한 세션의 주제가 국가-시민사회-시장이어서 러시아 시민사회의 현황에 대해 현지 전문가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시민사회를 논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것과 거의 같은 차원의 일이다. 또한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시민사회의 변동을 해석하는 데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날, 러시아 중앙선관위의 블라디미르 추로프 위원장이 미국 정부에 의해 입국거부자로 지정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른바 ‘마그니츠키 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세르게이 마그니츠키는 한 금융회사의 고문변호사였는데 러시아 관리들이 엄청난 규모의 공금을 횡령했다고 비난한 뒤 2008년에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다 구치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공식조사에서 간수들로부터 심한 구타를 당한 흔적이 있다고 밝혀졌지만 아무도 처벌되지 않은 데 대해 미 정부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러시아의 공직자 60여명을 한꺼번에 기피인물 명단에 올린 것이다. 러시아에서 법의 지배가 어떤 지경에 놓여 있는지, 이런 문제가 어떻게 국제적인 쟁점으로 비화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개혁-개방 이후 러시아 시민사회는 아주 느리고 힘들게 진화를 모색하고 있다. 기초적인 차원에서 민간 자선조직이나 문화단체들이 많이 생겼고 기업의 기부행위도 상당히 늘었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시민사회는 아직도 요원하다. 시민운동 관계자들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는 시민들의 권리의식이 낮다는 점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듯이 권리의식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면서 생기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머릿속에서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오랜 공산통치가 무너진 뒤 갑자기 불어닥친 천민자본주의 물결로 시민들의 성향이 ‘단자화’된 점도 큰 문제라 한다. 공익 지향과 연대의식이 시민사회를 떠받치는 주요한 기둥인데 자기 이해관계만 따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 시민운동이 활발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이 ‘시민사회’라는 말을 들으면 주로 무엇을 떠올릴까?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인권 존중 등 개혁 성향의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규범적 개념을 떠올린다고 한다. 아직까지 생활 속에서 보통사람들이 선뜻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소수의 시민사회단체들이 사면초가의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군대 내의 기합과 가혹행위에 반대하는 ‘러시아 병사들의 어머니회’, 스탈린 시대의 강제수용소에 관한 진실을 알리려는 ‘페름-36’, 언론인들의 헌법적 권리 보장을 위해 노력하는 ‘극단적 상황하의 저널리스트 센터’ 등 상당수의 인권단체, 사회운동단체들이 열악한 조건이지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들로부터 이익단체가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 외국의 재정지원으로 움직이는 반애국적인 조직이 아니냐는 눈총을 받곤 한다. 실제로 정치적인 사안을 다루는 시민단체들이 유럽연합이나 미국민주주의기금(NED)에서 지원을 받는 경우가 꽤 있다. 단체당 지원받는 평균 규모가 나라 크기에 비해 아주 작은 편이고, 대부분 프로젝트성 경비이며, 일반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거의 없는 현실을 생각할 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외세의 내정간섭에 민감한 국민정서 그리고 당국의 악의적인 선전으로 인해 시민단체들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러시아 정부는 시민사회협의회와 같은 공식채널을 가동해 친정부적 관변 엔지오들과는 소통을 하고 있다. 그러니 비판적인 시민단체와 관변단체의 관계가 좋을 리 없다. 그렇잖아도 미약한 시민사회 내에 심각한 갈등이 존재하는 상황인 것이다.

 

푸틴 총리가 다음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리라는 예상이 압도적인 가운데 러시아의 정치가 온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리된 민주주의’ 또는 ‘경쟁적 권위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지식인이 많았다. 미발육의 시민사회와 기형적인 민주주의가 병존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시민사회의 미래가 암울하기만 한 것일까? 혹시 낙관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지 모스크바 고등정경대학(HSE)의 드미트리 수슬로프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왔다. 러시아 국민들은 창의성과 혁신에 대한 갈망이 대단히 높다. 또한 고난 앞에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몸에 배어 있다. 그리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단기간에 동원될 수 있는 국민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들이 러시아 시민사회의 앞날에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오래 산 외국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바가 있었다. 러시아 대중의 지적 소양과 수준이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햇볕 좋은 주말 오후에 앳된 십대 여학생들이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러시아현대사박물관에서 혁명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나누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국민들의 이런 특징이 시민사회의 활성화로 이어질지는 두고봐야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러시아 시민사회의 미래가 독특한 맥락 내에서 ‘자기 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교수
(한겨레. 2011.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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