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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굴업도를 품고 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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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2-20 11:35 조회19,2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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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굴업도라는 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94년 문민정부의 핵폐기장 건설계획 발표를 통해서였다. 안면도에 핵폐기장을 건설하려다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겪은 정부는 몇 년 후, 무인도나 다름없는 굴업도를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이유는 그 섬이 핵폐기물 처분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모섬인 덕적도 주민들이 일제히 반대운동에 나섰고, 덕적도가 속해 있는 인천에서도 호응이 크게 일어났다. 싸움은 1년 이상 지속되었고, 김영삼 정부는 결국 활성단층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구실로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포기했다.

 

그토록 어렵게 지켜낸 이 섬의 대부분을 몇 년 전부터 어떤 재벌이 사들여 골프장과 관광위락단지 조성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기에 때묻지 않은 섬의 자연을 상품으로 가공해 팔면 큰돈을 벌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도 반대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인천에서 시민들이 모였고, 전국의 문화예술인들도 나섰다. 그러나 덕적도 주민들 중 상당수는 핵폐기장 건설발표 때와 달리 위락단지 건설을 찬성한다. 뭔가 경제적 이득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의 강압적 계획에는 저항했지만, 자본과는 한편이 된 셈이다.

 
이 와중에 한국녹색회 이승기 정책실장이 일년에 며칠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산호초를 찍으려다 바다에 빠져 숨졌다. 그와 나는 수십년 전부터 잘 아는 사이다.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겹치고, 신앙도 같기에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그는 나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고 대학에 자리를 얻었지만, 그는 외교학 박사과정을 마치고도 도무지 그런 경력을 쌓으려 하지 않았다. 환경운동 경력이 정치권 진입의 발판이 되는 세상이지만 그는 그런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때묻지 않은 자연을 가까이 하고 지키는 일이 그의 첫번째 관심사였다. 틈틈이 글을 쓰는 것은 그의 취미였다. 이호철 선생에게 소설을 배워 몇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지만, 문인 행세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가 2003년과 2004년에 녹색평론에 실은 글에는 자연을 향한 그의 순수하고 부드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깊은 산의 중턱을 깎아내고 도로를 내는 사업을 비판하면서도 그곳의 바위와 이슬이란 존재의 의미에 대해 노래함으로써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의 글이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그는 강원도의 산이나 제주도의 들판에 풍력발전기를 세우는 일도 적극 반대했다. 평온했던 자연 속에 갑자기 높은 기둥과 거대한 날개가 들어서서 소리내며 돌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게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원자력과 화석연료를 뛰어넘는 에너지전환이 시급하다고 보는 나와는 이로 인해 의견 충돌도 있었지만, 자연을 대하는 눈이 나보다 순수한 그로서는 아주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를 마지막 본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그때 그는 굴업도 이야기만 했다. 섬을 지키기 위해 여러 궁리를 하는 것 같았다. 아마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굴업도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그러던 그가 굴업도에서 숨졌다. 자본 권력에 맞서서 싸우다가 죽음을 맞은 셈이다.

 

그 깨끗한 굴업도에서 골프장과 위락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중장비들이 산봉우리와 해안의 커다란 바위들을 잘라내고 파손하는 광경을 상상하면서 그의 심정이라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바위와 이슬을 친구처럼 생각했던 그의 감수성이라면 견딜 수 없었겠지. 그래도 그는 크게 성내는 대신 산호초에 매료되어 굴업도에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있음을 알리려 했는데, 많은 사람이 자신과 같이 산호가 거기 있음에 감동하게 되면 골프 정도는 얼마든지 무시하고 멀리하고 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면 자연히 골프장 같은 것도 굴업도에 들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경향신문. 2012.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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