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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기로에 선 ‘충칭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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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2-27 12:18 조회19,7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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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부에 위치한 충칭시가 중국 정치의 풍향을 결정짓는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서부 내륙지역에 위치한 충칭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소재지였다는 인연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생소한 도시이다. 지난 2월6일 충칭시 전 공안국장 왕리쥔이 청두시에 소재한 미국 영사관으로 피신해 하루를 보낸 후 중국 정부에 인도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충칭시가 다시 국제 사회는 물론이고 한국 매체들의 관심을 모았다.

 

왕리쥔은 소위 태자당 출신으로 유력한 정치인인 보시라이가 충칭시 중공 서기로 임명된 이후 의욕적으로 전개하고 중국인들에게 널리 회자된 ‘범죄와의 전쟁’의 실무 책임자로 전국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물이 잠재적 경쟁국인 미국의 영사관으로 피신한 것 자체가 적지 않은 뉴스거리이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1989년 톈안먼 사태 와중에 팡리즈라는 반체제 인사가 베이징 주중 미국대사관에 피신해 1년여 동안 체류하며 미·중 사이에 외교 마찰을 초래했던 전례를 연상시켰다. 이번에 왕리쥔은 하루 만에 나왔지만 세간의 관심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이 그 진실은 무엇인가에 관계없이 이미 권력 교체기에 들어선 중국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2012년 가을에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고 향후 5년의 정치 노선을 결정하는 중공 제18차 전국대표대회가 예정되어 있는데, 이 사건이 충칭시 당서기인 보시라이의 정치 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의 권력 구도에서 최상층을 차지하게 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선출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진행되고 있다.

 

약 9명의 상무위원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는 이후 중국공산당이 어떤 길을 갈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시금석이다. 보시라이는 좌파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번 사건의 정치적 책임을 그에게 묻게 된다면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중공 내 권력 균형에도 미묘한 변화가 발생할 것이다. 둘째, 보시라이가 중공 서기로 부임한 이후 충칭시는 좌파의 새로운 모델로 부상했다. 소위 ‘충칭 모델’로 알려진 이 모델은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고 성장보다는 분배를 중시하며, 전통적인 사회주의 가치를 강조하는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노선은 최근 부패와 치안불안, 빈부격차 등의 사회문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서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개혁·개방 시기 세력이 크게 위축된 중국 내 좌파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활용해 충칭 모델을 개혁·개방 노선을 대체할 수 있는 모델로 선전하면서 노선투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반면 개혁파는 ‘충칭 모델’을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주의 모델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시장과 사회에 더 많은 권한을 주고 정부 역할을 줄이려는 소위 ‘광둥 모델’을 충칭 모델에 대비시키고 있다. 사실 충칭시와 광둥성의 정책이 다른 것은 지도자의 취향보다는 각 지역이 위치한 지리적, 경제적 환경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지역은 1990년대 이후 가장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이념 논쟁에서 상반된 노선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개혁파들에게 충칭 모델 형성 초기에 주요 동력이었던 범죄와의 전쟁을 지휘한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으로 도피한 것은 좌파 노선의 파탄이라고 공격할 수 있는 좋은 빌미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리쥔 사건의 마무리는 좌파와 개혁파의 힘겨루기 결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처럼 우울증 등의 심리적 요인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결론이 내려지면 보시라이는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정치적 피신으로 판명되면 보시라이의 정치 운명과 충칭 모델의 운명에도 암운이 드리워질 것이다. 중국에서 차기 권력구도의 결정을 둘러싼 본격적인 각축전이 때 이르게 시작된 느낌이다. 중국과의 관계가 계속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는 우리로서도 그 결과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중국학
(경향신문. 201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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