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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영] 상하이에서 생각한 ‘3·1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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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3-08 14:22 조회23,1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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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상하이를 찾았다. 상하이는 그 역사가 말해주듯이 역동적인 변화와 매력을 보여주는 곳이다. 처음 상하이에 왔을 때는 와이탄의 빅토리아식 건물, 동서양이 혼합된 신톈디 거리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보니 전에는 홀연했던 동방명주탑이 푸둥에 꽉 들어찬 마천루에 포위되어 있다.

 

끓어오르는 중국의 힘은 상하이를 세계적인 비즈니스 중심으로 만들었다. 상하이의 새로운 상징이 된 32.5㎞의 둥하이 대교는 세계 최대의 물동량을 처리하는 양산항으로 연결되었다. 상하이는 계속 커지고 있다. 조만간 다른 나라 사람들은 서울을 상하이로 들어가는 관문이나 중간 기착지 정도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에 또 마음이 쓰였던 것은 상하이 속의 우리 역사였다. 선거 탓인지 올해 3·1절에는 유난히 무관심했던 것 같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첫머리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임시정부가 세워졌던 상하이는 우리 민족에게 각별한 곳이다.

 

이전에 왔을 때는 임시정부의 규모가 겨우 이 정도였나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왠지 가슴이 먹먹했다. 날씨 탓도 있었을 게다. 상하이의 초봄 날씨는 쌀쌀맞기 그지없다. 온도계는 영상을 나타냈지만 해를 보기 어려운 날에 습기 먹은 바람이 외투 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풍찬노숙이라는 말이 좀 더 실감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안은 작은 박물관이다. 임시정부의 족적이 한눈에 보인다. 설명을 맡은 안내인이 서툴고 전시 내용도 빈약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그 임시정부가 없었으면 우리는 얼마나 초라했을까, 후손들의 작은 경제적 성공이 없었으면 그들의 노고는 또 어찌 되었을까 싶었다.

 

임시정부 유적지에도 그렇고 지금은 루쉰공원이 된 과거의 훙커우공원에도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다. 윤봉길 의사의 유품 모형과 처형장 사진은 양재시민의 숲 매헌기념관에도 있는 것들이지만 새삼 숙연한 마음이 일었다.

 

스물두 살 윤봉길은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는 거사 전에 강보에 싸인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일본군의 상하이 사변 전승 기념식장에 들어가 물통 모양의 폭탄은 던졌으나 자결하는 데 쓰려던 도시락 폭탄은 폭발시키지 못한 채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스물네 살 나이에 오사카에서 총살되었다. 무릎을 꿇리고 십자가 틀에 묶인 채 이마에 맞은 총탄 자국이 선연해 보였다.

 

상하이는 김구·윤봉길 같은 동아시아 각국의 혁명가들이 흘린 피와 땀 속에서 성장한 곳이다. 일본군의 침략에 밀린 이민과 혁명가들이 상하이 조계로 집결했다. 상하이는 서구 식민주의자들을 위한 조계로 형성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동아시아 혁명가들의 저항 기지이기도 했다.

 

이제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한국과 중국이 공감하던 시기는 지나갔다. 대신 중국과 한국은 새로운 국제분업 구조 속에서 다시 밀접해지고 있다. 한국의 연간 무역액은 2011년 사상 최초로 1조달러를 돌파했다. 이는 세계 9위의 규모이지만, 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는 너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2011년을 기준으로 미국과의 무역 규모는 1000억달러 남짓인데, 중국과의 무역액은 2200억달러를 넘어섰다.

 

이러한 상황에 세계적 도시 상하이 복판에서 느끼는 민족감정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일제에 맞서 결연히 일어섰던 3·1정신은 새로운 시대환경에는 맞지 않는 것인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세계정부나 동아시아 시민과는 모순되는 것인가.

 

이런 고민에 대해 상하이대학 왕샤오밍(王曉明) 교수의 발언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는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라는 세미나에서 수준 높은 세계문학의 기초는 차이를 보존하는 데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설파했다. 차이가 있을 때 더 깊이 있는 소통이 가능하고, 만약 세계어가 형성된다면 아주 수준 낮은 세계문학이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관념에 불과하다는 논의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관념은 현실의 일부이며 강력한 이상이 현실을 형성할 수 있으니 어떻게 이상을 현실화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1970~80년대에 민족경제론을 제기했던 고(故) 박현채 교수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밝힌 바 있다. 그는 민족경제를 단순한 폐쇄경제로 가두어두는 대신 민족적 생활양식의 보존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며 개념의 외연을 확대하려 했다.

 

3·1정신은 민족적 생활양식을 지키려는 마음이다. 이는 자신이 속한 지역과 사회의 역사적 미래에 자신을 참여시키는 책임감이다. 이는 서로 간에 차이를 보존하면서도 폭넓게 연대하려는 정신으로 이어진다. 세계성·지역성·민족성은 셋이면서 하나일 수 있다.

 

이일영 한신대 교수·경제학
(경향신문. 201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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