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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서] 3·11 1주기, 다시 묻는 ‘이중적 주변’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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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3-14 21:14 조회30,5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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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3월 11일 오후 필자는 삿뽀로에 도착하자마자 동일본 대지진을 겪었다. 홋까이도(北海道)대학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차 간 길이었다. 그날부터 3일간 그곳에 머물며 재해를 겪는 일본을 직접 관찰했기에 3·11 대재난에 특별한 감회가 있다. 그래서 그 뒷일이 궁금하던 터라 지난 12월 토후꾸(東北)대학의 강연 초청에 기꺼이 응했다. 가족 등 주위에서는 방사능 피해를 염려해 센다이행을 만류할 정도였으나, 그곳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적어도 겉보기에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센다이의 쯔나미 피해지역을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마을이 사라진 폐허에 파괴된 건물 잔해가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 있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안내해준 일본인 친구는 주변 지역이기에 이렇게 방치되는 것이라면서 토꾜나 쿄또 같은 중심 도시라면 이럴 수 없을 것이라고 분개했다. 그런데 이렇게 차별당한다는 의식을 갖는 사람이 그만이 아닌 것 같다. 원전 피해의 진앙지인 후꾸시마의 주민들이 중앙정부와 주류언론에 대해 느끼는 불신은 날로 커진다고 한다. 주요 스폰서인 전력회사의 눈치를 보는 주류 언론이 중앙정부와 더불어 원전 피해를 줄인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국가 위기시 중앙정부가 주민을 보호하기는커녕 국익을 위해 동원하다가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후꾸시마와 오끼나와 같은 주변 지역의 주민은 같은 운명체 곧 ‘버려진 사람들’(棄民)이라고 보는 주장도 나온다.


이 사실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전 후꾸시마현 지사(1988-2006) 사또 에이사꾸(佐藤栄佐久)의 발언이다. 그는 “이제부터 오끼나와의 시련을 우리 것처럼 생각하고 싶다”고 밝혔다. 후꾸시마와 오끼나와는 국가로부터 받는 복지보조금을 댓가로 군사기지나 핵발전소를 강요당한 차별을 받는 주변이라는 공동운명체 의식이 3·11 이후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화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그간 제창해온 ‘이중적 주변의 시각’을 다시 묻게 되었다. 그것은 서구 중심의 세계사 전개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한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억눌린 주변의 눈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그런 겹눈(複眼)을 가짐으로써 동아시아의 주변에 내재하는 비판성을 제대로 발휘하게 만드는 지적·실천적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사실, 주변의 시각이란 발상 자체는 요즈음 별로 낯설지 않다. 근래 주변의 시각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꺼짜오꽝(葛兆光)이다. 그는 예전과 달리 중국이 ‘다양한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시대’에 도달한 지금은, 주변 각 지역에 존재하는 여러 타자의 중국인식을 통해 과거와 오늘의 중국을 다시 보는 일이 중요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 본 중국’(從周邊看中國)이란 문제의식을 힘써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내세우는 ‘주변’의 시각이란 지리적인 의미의 주변 국가와 민족 들을 통해 중국을 좀더 다양하게 해석하자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중국이란 국가에 초점을 두는 것임을 우리는 곧 알아차릴 수 있다.

 

대만에서 동아시아적 관점을 강조하는 황쥔지에(黃俊傑)는 중화중심주의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중심-주변간에 존재하는 종속원칙’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문제의식과 일정 정도 통한다. 그러나 그는 중국 중심론을 넘어서기 위해 동아시아 문화의 다원성을 발견하는 데 그치고 있다. 다원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균등한 것이 결코 아니고 그사이에 위계질서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주변의 시각을 강조하는 그들은 동아시아 내부의 중심과 주변 관계, 그것도 중국이란 중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틈새에 위치한 무수한 주변적 존재(지역과 집단 등)에 소홀할 뿐만 아니라, ‘이중적 주변’의 시각의 또다른 측면인 세계사의 주변으로서의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도 결여되게 십상이다.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정태적(靜態的)으로 파악한 나머지 그 위계적 관계를 변혁하는 이론적·실천적 관점을 갖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이다.

 

물론 모든 학문은 과거에 관한 것이므로 과거시제로 씌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만큼 중심-주변의 위계질서가 만든 상황에 대한 분석으로 족한 게 아닌가 하는 반박도 제기될 법하다. 그러나 필자가 말한바 ‘이중적 주변’의 시각은 과거시제로 쓰이는 학문의 성격과 인간다움을 구현하는 현재시제의 실천을 겸하는 학문관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심-주변의 위계적 관계를 변혁하는 이론적·실천적 관점이 더욱더 긴요해진다.

 

이렇게 ‘이중적 주변’의 시각을 저들의 주변의 시각과 대비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다가 지난 1월 16일 저녁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며 분신한 밀양의 이치우(74세)씨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2008년 8월부터 신고리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해 송전탑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중 3분의 1이 넘는 69개의 철탑이 밀양에 세워지게 되자 밀양 주민들은 생존권과 재산권의 보장을 요구하며 공사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써 5년째 벌이고 있다. 그 길고 힘겨운 투쟁의 과정에서 한 노인이 희생된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뒤 일본은 핵발전소 54개 가운데 2개만 가동하고 있으나 우리는 현재 가동중인 21기에 이어 7기를 건설하고 있고, 6기는 계획 단계에 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재앙을 보고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이는 어리석음을 넘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가장 먼저 돌볼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는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다”라고 학생과 시민단체에 의해 선언될 지경이다.

 

필자는 여기서 왜 원자력발전소는 고리·월성·울진·영광·삼척 같은 머나먼 바닷가 마을에 자꾸 지으려 드는가에 주목한다. 이들 지역이 다름 아닌 한국의 주변이다. 위에서 언급한 후꾸시마나 오끼나와와 똑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다. 국가로부터 받는 복지보조금을 댓가로 군사기지, 핵발전소 아니면 송전탑을 강요당하는 주변이란 점에서 공동운명체가 아닌가.

 

‘이중적 주변’의 시각이 동아시아라는 세계사의 주변 내부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주변적 존재의 공통된 위치를 인식하는 데 기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동아시아 내부에서 작동하는 위계질서의 억압을 약화시키는 동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 새삼 묻게 된다.

 

그 답은 동아시아 주변의 현장 곳곳에서 억압에 맞서는 고투와 시민 각자가 연대하면서 자기 삶의 혁신을 경험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국가개혁 작업으로 이어질 때 탄력을 받을 것이다.

 

“말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죄다 선거판으로 몰려가버린 지금, 우리는 너무 춥고 아프다”는 한국의 주변 밀양 현장의 절규가 3·11 1주기이자 두 차례의 선거를 앞둔 지금 한층 더 아리게 들린다.

 

백영서 (연세대 사학과 / 서남포럼 운영위원)
(서남포럼. 2012.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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