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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가벼운 푸념도 천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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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2-18 15:28 조회16,8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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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당선인이 강조하는 ‘국민대통합’에서 무엇이 떠오르나? 많은 사람들은 세대·계층·지역·이념 갈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사회통합위원회도 이것을 대표적인 갈등으로 규정하고 이를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박 당선인은 공약집(374~377쪽)에서 단지 과거사 공약 2개만 제시했을 뿐이다. ‘부마민주항쟁 명예회복’과 ‘긴급조치 피해자 명예회복’이다. 아마 100% 이행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핵심 갈등은 해소될 리가 없다. 핵심 국정철학이자 총리 인사 원칙인 ‘법치’는 어떨까? 아마 떼법에 휘둘리지 않고, 범법 행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단하겠다는 것 아닐까? 이 역시 빈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핵심 현안인 세계 최악의 출산율, 자살률, 입시 경쟁과 청년 일자리 대란 등은 준법이나 법치의 문제가 아니다. 기득권 편향적이거나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법·제도를 정치가 제대로 고쳐주지 않아서다. 문제는 법치가 아니라 정치이며, 현안과 해법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면 5선 의원을 지낸 당선인의 전공인 정치쇄신 공약(378~383쪽)은 어떨까? 정당 개혁을 위해 “국회의원 후보는 선거일 2개월 전, 대통령 후보는 선거일 4개월 전까지 확정”, “부정부패 사유로 재보궐선거 발생시 원인제공자가 선거비용 부담” 등을 법제화하겠단다. 국회 개혁을 위해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제한하고, 불체포특권 폐지를 추진”하겠단다. 그런데 대선 후보를 4개월 전에 뽑도록 강제하는 것은 새누리당에 너무 유리한 정략이다. 재보궐선거 원인제공자에게 선거비용을 부담시키겠다는 것은 사실상 재산몰수형이다. 국회의원 면책특권의 제한과 불체포특권 폐지는 반민주적인 폭거다. 적어도 제왕적 대통령과 무소불위 검찰이 살아있는 상황에서는!


물론 박 당선인도 이런 공약들은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것이다. 다 동의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398쪽의 공약집 작성에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고, 나온 뒤에도 자세히 뜯어보지 않았을 테니! 한국의 선거전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텔레비전 토론 등에서 논란이 된 많은 현안들, 즉 비정규직,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문제 등은 당선인도 새누리당도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 안철수 후보라고 해서 다를 리 있겠는가? 유력 정당들이 정치 독과점에다 적대적 의존 상태인 한 콘텐츠 부실은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주요 현안의 난이도는 그 어떤 나라보다 높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실력은 중학생인데, 문제의 난이도는 대학생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정부의 성과가 좋을 리 없다.

박 당선인은 사정이 더 나쁘다. 본인의 독특한 이력과 위상 때문이다. 취직, 육아, 교육, 주거 등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몸소 체험하지 못했기에 정책과 현실의 관계를 잘 모른다. 일찍부터 권력자였기에 계급장 뗀 상태에서 정책 논쟁을 치열하게 한 적도 없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진 빚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머잖아 대통령에 취임할 신분이어서 무심코 내뱉은 가벼운 푸념도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그게 아닙니다!’ 소리는 듣기가 더 힘들게 됐다. 게다가 한국의 보수와 관료는 권위주의와 일사불란한 집행에 익숙하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면 완화하거나 보완할 방법은 있다. 박 당선인은 오만과 독선의 늪에 너무 가까이 있다. 부실한 도낏자루와 무딘 도끼날로 오래된 모순·부조리라는 고목을 찍어 넘겨야 한다. 너무 어려운 상황이다. 이것만 인식해도 대한민국은 한결 나아질 것이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한겨레, 2013.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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