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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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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2-25 15:12 조회17,0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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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봄의 기운이 얼핏 느껴지는 이즈음, ‘희망의 새 시대’를 구호로 내건 박근혜 정부가 곧 출범한다. 이긴 편에서 통합의 정치를 내세우며 정권인수를 위한 작업을 해나가던 지난 겨울은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실망의 쓰라림을 곱씹던 날들이었다. 고공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국민들 사이에 부정선거 의혹이 가시지 않는 것도 상실감이 그만큼 컸음을 말해준다.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과연 국민 절반의 상처입은 마음은 가라앉았는가?


실상 지난 선거가 그토록 관심을 불러일으킨 원인은 이명박 정권의 실정을 심판하자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경제민주화가 선거기간 내내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고 정치개혁을 앞세운 안철수 후보가 돌풍을 이어갔던 것도 근본부터 바꾸어나가야 할 시기라는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빈부격차 해소와 복지사회 추구, 평화통일을 위한 토대 구축, 서열과 경쟁 중심의 교육제도 개혁과 사교육근절 등의 의제들이 부각되면서 진보 일각에는 이번 정권교체가 한국사회를 한단계 도약시킬 ‘2013년 체제’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기대조차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이 컸던 만큼 혁신의 기획들이 분출했고 마치 새 경작법을 다듬으며 봄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과도 흡사하였다. 그러나 대선에서 지고 모든 주도권이 상대에게 넘어갔으니 어찌 들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밀려오지 않았겠는가? 비록 이상화의 유명한 시구와는 달리 지금은 들이 문자 그대로 ‘남의 땅’이 된 시대는 아니지만, 새 정부가 ‘희망’을 말함에도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보다 퇴보의 우려가 앞서는 데는 “살진 젖가슴과도 같은 저 들”을 기득권의 손에 넘겨주고 말았다는 통한도 작용하고 있을 법하다.


그러나 정권교체 여부보다 더 깊이에서 움직이는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면이 떠오른다. 대선은 실패했어도 ‘2013년 체제’라는 표현에 담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여망은 한낱 몽상만은 아니었다. 경제차원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선거 내내 울렸던 것은 그 같은 여망 자체가 국민들의 생활상의 욕구에서 발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공정한 분배와 복지사회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은가? 또 선거 막판에 북풍의 시도가 있긴 했어도 평화통일 문제에서 박근혜 진영도 현 정권보다는 더 전향적인 구상을 내놓지 않았던가? 정권교체가 실패함으로써 변화를 강하게 추진할 동력은 얻지 못했지만 새 정부가 이 도도한 흐름을 외면한다면 위기에 빠질 위험도 큰 것이다.


무엇보다 48%에 달하는 유권자가 이 과제를 위해 정권교체를 희망하였고, 박근혜 후보도 진보적 의제를 일정부분 수용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기에 지지층 가운데서는 개혁에 동조하는 세력이 없지 않을 터이다. 그런 만큼 새 정부가 내세우는 ‘희망’도, 진보가 2013년에 걸었던 의미도, 패배한 쪽이 이 시대의 또 다른 주체로서 들에 나설 때 살아날 수 있게 된다. 그람시의 말 그대로 지금은 기동전보다 진지전이, 저 시민사회라는 들판에서의 일상적인 싸움이 더욱 중요한 국면일 법하다.


만약 새 정부가 이 역사의 흐름에 역행한다면 들불의 저항이 촉발될 수도 있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그렇기에 새 정부가 실패할 것이라고 예단할 이유도 없거니와 그 나름의 시대적 역할을 하게끔 추동할 필요도 생긴다. 위대한 것은 봄이고, 경작하는 마음이고, 역사의 순리이기 때문이다.

봄이 시작되는 내달 2일에 강정마을 전체를 도서관으로 만들어서 패권과 전쟁의 강요에 맞서 평화와 연대로 무장하자는 모임을 가지겠다는 후배 문인들의 전언이 들려온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는 시기에 진정한 봄은 이처럼 제주 저 남단에서부터 오고 있다.


시인의 비감한 결어와는 달리 우리는 들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제 제주의 봄소식은 남해로 상륙하여 동백꽃을 툭툭 떨구고 머지않아 북상하는 벚꽃의 화려한 진군이 시작될 것이다. 봄이 봄답지 않다고 한탄하기보다는 손에 호미를 쥐고 흙부터 밟을 일이고, 다가오는 봄을 한껏 호흡하면서 들을 일구어갈 일이다.


윤지관 |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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