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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핵폐기, 남아공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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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3-27 16:58 조회15,9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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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드 클레르크는 자국이 보유한 7개의 원자폭탄을 모두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남아공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핵무기를 폐기한 국가가 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 남아공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유엔 제재 결의의 단골 대상이었고, 이웃 나라 앙골라와 분쟁 중이었으며, 국민들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강력한 억압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핵무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백인들의 정권유지 수단으로 비밀리에 개발되었다. 1989년 가을 드 클레르크가 취임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냉전이 끝남에 따라 앙골라와의 분쟁은 해소되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흑인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강력한 경제제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이때 드 클레르크가 선택한 길은 넬슨 만델라를 풀어주고, 아프리카민족회의나 공산당 같은 금지된 단체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었다. 안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하고 민주화를 시작함과 동시에 밖을 향해서는 평화국가로 나아간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1980년대 말의 남아공 상황은 지금의 북한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다. 북한도 당시의 남아공과 마찬가지로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고, 강한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고, 다른 나라와 분쟁 중이고, 민중은 강력한 억압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아공은 핵을 폐기했다. 북한의 경우와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남아공과 북한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권력을 잡은 집단이 권력을 내준 후에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느냐에 대한 판단의 차이일 것이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만델라를 풀어주기 전에 협상과정에서 흑인들이 정권을 잡더라도 자신들이 그 전과 마찬가지로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94년 흑인들이 참여한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드 클레르크는 부통령으로 수년간 권력을 누렸다. 만일 만델라를 비롯한 아프리카민족회의 간부들이 피의 보복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국제적 제재가 심하고 흑인들의 저항이 거세고 그 대가가 막대하다고 해도 백인 권력층은 최후까지 아파르트헤이트 유지를 위해 싸웠을 것이다.


북한 권력층의 가장 큰 관심은 권력의 유지와 자손들의 안전일 것이다. 그들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것만이 이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미국과 남한에서 강하게 압박을 가하고, 굶주리는 민중의 동요와 탈출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은 다른 선택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남아공의 사례는 북한의 핵폐기와 변화를 끌어내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아공에서는 냉전 종식 후의 평화협정과 만델라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었고, 드 클레르크가 이에 화답하여 핵무기와 아파르트헤이트 폐기를 결정했다. 북한의 경우에는 평화협정과 남북연합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평화협정은 북한 권력층이 외부의 공격으로 망하지 않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남북연합은 그들의 자손들도 언젠가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남아공 핵폐기 사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와 고립화가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제네바 합의 파기 후 진행된 북한의 핵개발 과정을 살펴봐도 그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북한의 핵무기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남아공 사례는 이를 끌어낼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진정으로 북한의 핵폐기와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북한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 조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필렬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경향신문, 201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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