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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엽] 박 대통령이 근대화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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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5-22 19:00 조회17,5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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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윤창중씨의 행태 가운데 어떤 쪽에 더 화가 났을까? 여성 인턴 성추행일까, 아니면 귀국 후 기자회견을 통해 벌인 청와대와의 진실공방일까? 내 생각에는 후자 쪽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윤창중씨는 박 대통령이 직접 인수위 대변인으로 발탁했다. 인수위 대변인 이전이나 이후 행태 모두 여야를 막론하고 그에 대한 부정적 의견은 차고 넘쳤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그를 청와대 대변인으로까지 임명했다. 박 대통령이 합리적이라면 이렇게 반대가 많은 인물을 중용한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인사 기준이 능력이나 탕평이 아니라 오직 충성심임을 여권 전반에 뚜렷하게 알리는 것일 뿐이다. 윤창중씨 중용은 충성의 분위기를 유도하는 통치술일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윤창중씨의 다소간 ‘방자한’ 행태조차 내버려두는 것이 통치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윤창중씨는 과도하게 방자해서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렸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무마하기 위해서 최소한 혼자 ‘덮어쓰는’ 충성심을 보이기는커녕 진실공방을 벌여 대통령을 더욱 궁지로 몰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충성을 유도하는 박 대통령의 통치술 자체가 오류였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그러니 박 대통령이 몰랐다고 한 “한 길 사람 속”은 자신이 중용한 자의 성적 방종함보다는 그가 보인 배신의 작태일 것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처럼 충성을 얻으려는 노력은 근대 세계에서는 대체로 비극적 결말에 이른다. 근대 세계에서도 조직은 위계적으로 구성될 때가 많다. 권력에 근거한 명령체계가 효율적인 영역이 많기 때문이며, 관료 조직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 때문에 자주 착종이 일어나긴 하지만 근대적 조직에서 충성은 기본적으로 주군과 신하 관계의 그것이 아니다. 충성은 상급자의 합법적 명령에 대한 복종 태세 그리고 조직 본연의 목적에 대한 헌신을 뜻할 뿐이다.


그런 근대 세계 안에서 사적이고 전근대적인 충성을 만들어내려 하면, 그가 얻게 될 인물은 미움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직언을 하며 때로 목숨마저 바치는 이상적인 ‘신하’가 아니다. 전근대 사회에서 신하는 주군에게서 삶의 의미를 길어올리는 자이지만, 그런 식으로 삶의 의미 획득이 불가능해지는 것이 근대 사회이다. 따라서 신하를 원한 이는 능력만으로는 그 직위에 도달할 수 없는 자, 충성의 사적 대가를 요구하는 자, 호가호위하며 하급자를 괴롭히는 자, 혹은 기회주의자를 얻게 될 뿐이다.

이런 일은 도처에서 발생한다. 내가 속한 직업세계의 부끄러운 행태의 일부를 예로 들자면, 자신의 ‘똘마니’를 후임 교수로 임용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던 교수는 하나같이 믿었던 후임자에게 ‘배신’당하는데, 그런 시간은 놀라운 정도로 빨리 다가온다. 그 이유는 교수의 경우 임용이 최대의 보상이고 그 이후엔 마땅히 충성의 대가로 베풀어줄 보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박 대통령이 근대화됐으면 좋겠다. 여기서 근대화란 일베식 표현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슬로건과 달리 엄밀하게 사용된 개념이다. 업무와 소통 능력에 따라 발탁하면 많은 게 쉬워질 것이다. 그들은 유별난 충성을 바치진 않지만, 할 일을 제대로 하고 대통령에게 마땅한 존중의 태도를 지니고 직무를 충직하고 무사심하게 수행할 것이다.

신문·방송은 윤창중 사건 때문에 “대통령의 방미 성과가 가려졌다”고 떠들어댔는데, 엄밀히 말하면 윤창중씨는 자기 스캔들로 방미 성과의 부재를 은폐한 것이기도 하니 의도치 않게 충성심을 발휘한 면도 있다. 그러니 이제 박 대통령도 윤창중씨에 대한 분노를 풀고 그에 대한 처분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사법기관에 맡기고 공약한 복지정책이나 제대로 하면 좋겠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한겨레, 201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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