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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운] '만만디'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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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6-21 15:13 조회32,8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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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다음 달 베이징에 학술회의가 잡혔다. 전공 때문에 중국자주 가지만 한동안 베이징엔 갈 기회가 없었다. 몇 년 전 잠시 들렀을 때도 예전 유학 때 살던 동네가 통째로 뒤바뀐 데 경악했었는데 그로부터 7년이 지났으니 또 얼마나 변했을까. 살짝 상기된 마음에 서울에 와 있는 중국인 교수에게 “요즘 베이징 어때요”하고 물어보았다. 대답은 한 글자 ‘롼(亂)’이다. 어딜 가든 질서가 엉망이란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제일 뜨거운 화제 중 하나가 ‘중국식 길 건너기’다.

고도성장 부작용 겪고 있는 중국

‘중국식 길 건너기’라는 유행어는 지난해 10월 웨이보에 실린 어느 사진에서 비롯됐다. 자전거, 삼륜차와 뒤섞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를 느긋하게 건너는 진풍경이 담겨 있었다. 개중엔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도 있었다. 곧바로 중국CCTV가 취재에 나섰다. 대로 한곳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관찰하니 한 시간 동안 빨간불에 건너는 사람이 600명이 넘었다. 베이징만이 아니다. 저장성에서도 이달 초 시행한 집중단속 결과 20일 동안 1만건 이상을 적발했다. 최근 여론은 베이징 공안국이 발표한 벌금제를 두고 공방 중이다. 인터넷은 물론 초·중·고교 학급에서도 토론을 벌일 정도라니 ‘중국식 길 건너기’는 명실공히 거국적 화제인 것이다.

관련하여 각종 ‘어록’들도 등장했다. “횡단보도가 실제 존재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마음속에 횡단보도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교통법규 지키다간 열 받아 먼저 죽는다” “다같이 어기면 그게 법이다” 등. 인터뷰에 응한 시민 중엔 나는 절대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노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청년도 있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중국인의 옅은 규범의식, 낮은 문화소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그러나 사태의 심층을 잘 살펴보면 본질은 다른 데 있다.

우선 주요 도시의 도로설비와 신호체계가 전적으로 차 중심인 게 문제다. 매연을 뒤집어쓰고 십분 이상 기다려야 돌아오는 초록불은 십초면 빨간불로 바뀐다. 건장한 남자도 뛰어야 건널 수 있다. 또 횡단보도를 찾으려면 버스나 지하철 내린 곳에서 수백m를 걸어야 한다. 보행자들이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차들이다. 초록불에도 횡단보도는 유턴하는 차, 우회전하는 차, 심지어 직진하는 차들로 점거당하기 일쑤다. 어떤 이는 ‘중국식 길’이 있으니 ‘중국식 길 건너기’가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말하자면 ‘중국식 길 건너기’는 고도 경제성장의 다른 얼굴이다. 앞만 보고 달리사회는 사람을 돌아볼 여력이 없다. 이십년 걸릴 일을 임기 안에 해치우려는 공무원들의 닦달 아래 모든 시스템은 속도전에 돌입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고상한 문화는 생기려야 생길 수 없다. 멈칫하면 기회를 놓치고 낙오자가 된다는 초조감에 온 사회가 달아오른 지금, 중국의 대로는 차와 보행자 사이 목숨을 건 쟁탈전으로 매일같이 몸살을 앓고 있다.

양보와 배려의 덕목 생각할 때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한국의 고속성장에 ‘빨리 빨리’가 있었던 것처럼 중국의 ‘만만디’는 어느새 ‘빠르고 사납게’로 대체되었다. 우리보다 더 압축된 고도성장을 겪는 탓에 사회적 긴장도가 곱절일 뿐 본질적으로 두 사회가 다를까. 서울 도로에서 운전자들의 거친 언사는 예삿일이며 버스나 지하철은 큰 소리로 떠들거나 거침없이 밀치고 가는 사람들로 늘 피로하다.

문득 올 초 나하(那覇)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슈리성(首里城)을 둘러 난 좁은 길을 일행과 걷고 있었다. 50m쯤 앞에서 한 여고생이 길옆에 멈춰 섰다. 왜 그러나 했더니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그때 느낀 것은 그 여학생에 대한 고마움보다 그 도시에 대한 경외였다. ‘만만디’를 다시 생각할 때다. 느리고 둔한 게 아닌, 양보와 배려의 덕목으로.

백지운 서울대 연구교수·통일평화연구원
(국민일보, 201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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