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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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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08-05 16:39 조회30,5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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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정부는 슈타지(국가안전부)에 10만명의 직원과 20만명의 정보원을 두고 국민들을 감시하면서 정권을 유지했다. 이런 자막과 함께 화면이 밝아지면 1984년 11월 어느 날 한 소시민이 슈타지 건물의 방 한 칸으로 잡혀와 심문을 받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녹음기가 켜지고 자술서에 써낸 것을 말로 다시 되풀이하는 방식의 진술이 강요되는데, 까닭인즉 그의 이웃이 서독으로 탈출했기 때문이다. 우리 현실로 옮기면 탈북자의 옆집에 사는 죄를 저지른 거였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이게 어떤 영화인지 벌써 알았을 것이다. 플로리안 헹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첫 장편 영화 <타인의 삶>(2006)이다.

이 장면에서 심문관으로 나온 비슬러 대위는 얼마 후 유명한 극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는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드라이만의 감추어진 사생활까지 꼼꼼히 살피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동독 체제의 억압성과 타락한 관료제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이 영화가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붕괴한 국가 동독의 치부를 폭로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독일인들에게는 직접적 경험이기 때문에 영화를 통한 재경험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영화의 핵심은 냉정한 정보요원 비슬러가 극작가 커플의 예술가 생활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동안 점차 딴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을 그려낸 데 있다. 그는 드라이만을 몰래 보호하는 일을 하다가 한직으로 쫓겨나고 거기서 동독의 종말을 맞는다. 그리고 ‘슈타지 문서관리청’에서 자료 열람을 통해 자신의 감시자가 오히려 보호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한 드라이만은 소설 <착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를 써서 비슬러에게 헌정한다.


이 슈타지 문서관리청은 흔히 ‘가우크 관청’이라 불리는데, 개인의 이름이 정부 기구를 대표하게 된 것은 이 기구의 출범과 운영에 목사 출신 인권운동가 요아힘 가우크가 결정적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89년 ‘가을혁명’의 절정기에 시민들을 이끌고 슈타지 본부와 지부들을 점거하여 슈타지 요원에 의한 자료 파손을 막았고, 이듬해에는 과거 청산을 위한 문서관리법을 관철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슈타지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들을 민주주의 진전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아마 가우크의 노력이 없었다면 영화 <타인의 삶>은 구성을 달리해야 할지 모른다.


그 가우크는 소속 정당의 배경이 없음에도 작년 3월 독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근 그의 이름을 뉴스에서 보고 내가 먼저 떠올린 것도 슈타지였다. 과연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개인정보 수집 활동을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에 관해 그가 “누구든지 양심에 따라 정보를 공개하고 행동했다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는 보도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이것은 같은 사건을 두고 “정부기관의 민간인 전화 통화와 개인정보 수집은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견해와는 상반된 관점이다. 그것은 헬기의 이라크 민간인 학살 영상이 포함된 미군의 수많은 전쟁범죄 정보를 위키리크스에 건넨 브래들리 매닝의 재판 공방과 맞물려 미국의 국가 정체성에 관한 심각한 재고를 요구한다.


물론 동독의 국가안전부와 미국의 국가안보국은 영화와 현실이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고 몰래 집안으로 잠입하는 장면이 보여주듯 전자는 수공업 단계인 반면, 후자는 21세기의 초일류 첨단산업이다. 전자는 경직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주민 통제가 목적이었던 만큼 본질적으로 국내용이지만, 후자는 전세계에서 하루 30억개의 통화를 도청하는 글로벌 정보 활동이다. 영화의 비슬러 대위나 현실의 매닝 일병이나 조직의 배반자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슬러의 배반은 ‘인성의 회복’이나 ‘인도주의의 구현’으로 미화되고 있음에 비해, 매닝과 스노든의 배반이 더 높은 차원의 가치관을 위한 자기희생으로 이해되자면 긴 역사적 논쟁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때, 드라이만이 사라진 정보요원 비슬러를 위해 헌정 소설을 쓴 것을 본떠, 누군가 스노든과 매닝을 위해 소설을 쓴다면 제목을 조금 바꿔 <정의로운 사람들을 위한 소나타>로 붙여야 할 것이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한겨레, 2013.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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