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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달력- 시간의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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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3-12-09 15:01 조회16,0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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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013년 마지막 달이다. 책상 위 달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시간은 새로운 2014년 달력을 통해 다시 `시작`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달력이라는 사물을 통해 시간이 `재생`되고, 일정한 주기마다 늘 `재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신기한 것이다. 이 사물은 이미 지나간 시간을 주기적 일상으로 `영원회귀`시키는 마술책인 동시에 아직 당도하지 않은 시간을 미리 당겨서 벽과 책상 위에 숫자로 새겨놓은 미래의 비문이다. 이런 점에서 달력은 `이미` 또는 `아직` 없는 시간을 현재화하는 사물이다.

달력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일정하게 반복되는 날짜와 요일을 통해 다시 붙잡을 수 있다는 `관념`을 형성한다. 이 사물의 본질은 거슬러가지 못하는 시간의 비가역성(非可逆性), 즉 우주적 엔트로피를 인간적 관념의 마술로 극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마술을 통해 주기적으로 재출발하는 시간의 반복성이 바로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인간 존재에게 달력이 발명한 일상이라는 관념은 안심을 준다. 그것은 무질서하고 속절없는 우주의 운동을 엄격한 패턴을 통해 익숙한 기호로 바꿔 놓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측하고 계획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정말 이 숫자로 필사된 시간의 책을 반복의 기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새 달력에서 보는 숫자들, 그것들이 지시하는 요일은 실은 가보지 못한 우주의 낯선 행성들과 같다. 이번 주말은 지난 주말과 같은가? 2014년 12월 6일은 2013년 12월 6일과 같을까?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전적으로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은 없다. 반복되는 것은 개별적이고 무질서한 사물들의 사태를 반복된 `질서`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관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맘때 누군가에게 선물할 달력을 고르는 일을 즐거워한다.

 
 그것은 달력의 세계가 "두 손이 나를 사육"하고 "두 발이 나를 길들이는" "어제의 힘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이장욱 `세계의 끝`) 반복적 일상이어서가 아니다. 2014년 달력의 지구는 2013년 지구와는 다른 낯선 행성일 것이다. 난 "거기가 우리가 닿은 처음"(이원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시간일 거라 믿는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3.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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