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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블랙박스 투표와 선거투명성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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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1-08 16:11 조회17,1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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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남아프리카 최초의 전국민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던 1994년의 대선 투표율은 95퍼센트가 넘었다. 투표자 행렬이 워낙 길어 빠르면 다섯시간, 지역에 따라선 다음날까지 줄을 서야 했다. 기다리다 못해 투표장의 담을 넘는 일까지 벌어졌다. 평생 처음 지도자를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유권자들의 열망은 그만큼 간절했다. 우리는 그 심정을 너무 잘 안다. 민주화의 물줄기를 뚫었던 6월항쟁의 주요 요구사항이 직선제 개헌이었다. 개정된 헌법으로 1987년 12월16일 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수요일이었다. 거의 90퍼센트 투표율, 국민의 열기는 대단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한 시민은 “도장을 쥔 손이 떨려서 두 손을 모아 찍어야 했다”고 술회한다. 선거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될 순 없지만 선거 없이 민주주의를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선거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자유의지로 투표할 수 있는 선거가 인권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선거가 중요한 인권에 속하는가.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적 의사결정에 대등하게 참여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헌법에서 민주 선거 원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48년 스위스 헌법이 그 효시라고 한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세계를 통틀어 선거를 통한 민주제를 채택한 나라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을 완전히 개방하고 1인1표 원칙을 지킨 나라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머지는 독재제 혹은 혼합제 국가들이었다. 1900년이 되어서도 성년의 남녀 시민이 똑같이 투표권을 행사하여 정부를 선출할 수 있었던 현대식 민주국가는 뉴질랜드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민주주의는 극도로 인기 있는 보편적인 정치체제로 자리잡았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나라는 이제 지구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사우디아라비아, 피지, 통가, 브루나이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스스로 내세우는 나라 중 실질적으로 선거민주제를 실시하는 곳이 얼마나 될까. 프리덤하우스에 따르면 2013년 현재 118개국에서 유의미한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교체하고 있다고 한다.


2012년 12월19일 우리나라 유권자들 중 적어도 일부는 여론조작과 허위정보 심리전에 의해 눈에 안대가 덮인 상태에서 민주주의의 그림을 그리도록 조종되었다. 그리하여 주권재민 인권 원칙은 적어도 상당 부분 실종되어 버렸다. 지난 대선을 보편적 인권 원칙에 비추어 백퍼센트 진정한 선거였다고 보긴 어렵다.


인권에서 선거가 중요하게 간주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주권재민 사상 때문이다. 이것의 논리구조는 다음과 같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성과 자율성을 지닌 소우주와 같은 존재다. 이런 소우주들이 모여 이룩한 사회공동체에서 유일 단독자 혹은 소수 엘리트들이 그 공동체의 존재론적 절대권위인 주권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그건 원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기 권리를 ‘출자’하여 주권을 형성하고 그것을 공동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다. 바로 이 점이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 원칙이 인권과 연결되는 논리다. 그런데 주권재민 인권을 구체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선 크게 보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모두가 함께 참여해 직접 의사결정을 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대표를 뽑아 간접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한다. 따라서 직접(행동) 민주주의로 자기 뜻을 표출하는 것, 그리고 선거를 통한 대의제로써 주권재민을 행사하는 것, 이 둘 다 중요한 인권이다. 전자에 주목하는 사회운동형 민주파와 후자를 중시하는 제도정당형 민주파는 결국 주권재민 인권 원칙을 이루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알다시피 현대국가에선 대의민주제가 대세다. 때문에 선거는 주권재민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고 민주주의의 은유처럼 되어 있다. 지난해 중앙선관위가 창설 50주년을 맞아 발표한 보도자료에 보면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란 표현이 나온다. 선거가 민주적이 되려면 인권 원칙을 따라야 한다. 유권자 한 사람이 한 표씩 행사하는 평등선거는 자율적 인간 존엄성이라는 인권 원칙을 전제로 한다. 성별·인종·재산·학력과 상관없이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 역시 차별을 금지하는 인권 원칙에서 도출된 것이다. 필자가 민주선거를 너무 인권 중심으로만 설명하는 것 같은가. 조금 길지만 다음 인용문을 읽어 보시라. “1. 모든 사람은 직접 참여하든, 자유롭게 선출된 대표를 통해 참여하든 간에, 자국의 정부운영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의 공직을 맡을 동등한 권리가 있다. 3. 인민의 의지가 정부 권위의 토대를 이룬다. 인민의 의지는, 주기적으로 시행되는 진정한 선거를 통해 표출된다. 이러한 선거는 보통선거와 평등선거로 이루어지고, 비밀투표 또는 비밀투표에 해당하는 자유로운 투표절차에 따라 시행된다.” 바로 세계인권선언 21조다. 민주라는 말을 한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민주주의 권리 조항이라 불리는 유명한 원칙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 직접(행동) 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주권재민, 일반의지의 표현, 공명선거 등이 모두 인권 원칙 그 자체인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진정한 선거’(genuine elections)라는 말이다. 진정한 선거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주해들의 공통분모를 찾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정행위, 청탁, 매수, 방해, 협박이 없어야 한다. 둘째, 선거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투표용지, 투표소 위치, 장애인을 위한 편의, 투표소 수 등이 유권자의 욕구를 반영해야 한다. 셋째, 선거관리의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선거인 명부 확정, 투표자 확인 및 기록, 개표의 엄정함, 전자투표 기계의 문제점 대비, 부재자 투표의 투명성 확보, 기록관리의 연속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넷째, 선거자금과 비용이 공개적이고 정확하게 회계처리되어야 한다. 다섯째, 선거운동 과정에서 역정보 혹은 허위정보 유포, 여론조작, 미디어 등을 통한 여론왜곡, 공공기관에 의한 선전·선동 행위가 없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보장되어야 진정한 선거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선거를 일컫는 용어가 있다. 이른바 ‘블랙박스 투표’다. 교묘하게 조정되고 불투명하게 진행된 흑선거를 뜻한다.



일년이나 지난 시점에서까지 대선의 여파가 정리되지 않고 있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베브 해리스라는 민주주의 활동가는 블랙박스 투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주주의를 사람들이 직접 그리는 그림에 비유한다면 불투명한 선거는 사람들의 눈에 안대를 씌운 채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과 같다.” 어찌 보면 2012년 12월19일 우리나라 유권자들 중 적어도 일부는 여론조작과 허위정보 심리전에 의해 눈에 안대가 덮인 상태에서 민주주의의 그림을 그리도록 조종되었다. 그리하여 주권재민 인권 원칙은 적어도 상당 부분 실종되어 버렸다. 지난 대선을 보편적 인권 원칙에 비추어 백퍼센트 진정한 선거였다고 보긴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의심스러운 뒤처리 과정 때문에 블랙박스 투표 대통령이 청와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조롱이 만연해 있지 않은가.

이제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자판에서 나온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번 일은 21세기 첨단 정보기술에 의해 고전적인 선거 투명성 권리가 유린된, 전근대적이면서 동시에 탈근대적인 정치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관한 온갖 고급 이론들이 소개되어 있는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최저 기준인 진정한 선거권 하나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이게 우리 정치의 적나라한 자화상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면서도 정작 근대적 ‘정상성’의 확보에선 낙제점을 받는 모순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인권에 있어 특히 뼈아픈 부분이다. 인권은 크게 보아 계몽주의 전통을 계승한 근대의 정치적 기획에 속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처럼 모든 방법을 동원해 철저히 진상을 밝히고 반민주 사범을 엄벌에 처하는 것이 주권재민 인권회복의 첫걸음이다. 근본적으로는 시민들의 눈이 더 밝아져야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외부의 선전과 조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어둠의 작전세력이 우리 눈에 안대를 씌우는 장난을 쳐도 판단이 흐려지지 않을 만큼 독립적인 시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로버트 하인라인의 말이다. “정신이 자유로운 인간은 어떤 강압으로도 꺾지 못한다. 형틀도, 원자폭탄도, 아니 그 어떤 것으로도 자유인의 마음을 정복할 순 없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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