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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경] 지금-여기에서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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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1-22 15:18 조회17,0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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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의 해가 밝았다며 희망 어린 인사를 주고받았다. 해가 바뀐다고 갑자기 새날이 열리지 않음을 모르는 바 아니고, 아직 설은 한참 남았으니 달력에 새겨진 신정이라는 말만큼이나 양력 새해 첫날에 주고받는 갑오년 인사는 어색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올해 특히나 마음을 모아 신년에 떠오를 태양을 기다렸던 것은 아마도 지난 한 해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답답한 마음 탓인지 역사 속의 갑오년을 새기면서 새해에는 천지를 뒤흔들 개혁의 바람을 기대하는 신년인사도 유난히 많았다.

그러고 보면 역사가 진보한다는 시간관념만큼이나, 회귀하고 순환하는 시간에 대한 믿음도 강한 듯하다. 그럴 이유도 충분한 것이, 절기를 따지고 환갑을 기리는 음력의 시간관념을 따르거나 불교의 윤회를 굳이 믿지 않더라도, 사실 작년 한 해 동안 세상이 과연 거꾸로 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과연 21세기를 사는 것인지 존재에 혼란을 느낀 사람들이 드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미 오래전 일인 듯 느껴지는 지난 정권 때에는 우리 사회가 80년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곳곳에서 들렸다면, 이번 정권에서는 70년대 복고풍이 유행의 첨단이 되었다. 이제는 굳어졌다고 생각한 시민의 권리들이 사회 곳곳에서 후퇴하고 유신 시대의 인물들이 속속 복귀하더니만, 끝내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수출하고 관련 학과가 생겼다. 국군의 날 행진이 부활하면서 서울 시내에 장갑차가 지나가고 미스 코리아들이 그 자리를 함께했다는 데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조차 잃게 된다.


물론 과거로의 회귀라고 해서 모두 같은 회귀인 것은 아니다. 80년대 부르던 동학농민가를 부르며 못 이룬 후천개벽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것이야 사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희망을 함께하면서도 갑오년이라고 선뜻 가슴 벅차할 수만은 없는 이유는,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맞이한 갑오년이라면 혹여 새로운 역사를 쓰지 못하고 이후 자칫 을미년의 탄압이나 혹은 경술년의 합병으로 이어질까 봐 두려워서이다. 또한 70년대나 구한말 등 과거와의 동일성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차이를 무시하거나 변화한 현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 가야 할 책무를 회피하게 될까 경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게다가 요즘의 현실을 보면 정답이 있으니, 한번 크게 뒤엎기만 하면 저절로 해결될 거라는 생각 자체가 안이해 보이기도 한다. 많은 현안이 짧게는 지난 정권, 길게는 식민지 시대와 분단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외환위기 이래로 ‘민주정부’에서 시작된 문제들도 많아서 한칼에 도려내기도 어렵다. 물론 공공재의 사유화나 민주주의 후퇴에 대해 분노가 퍼져나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되살려서 될 일은 아니어 보인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의 면면과 세대 구성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어제의 해법이 시야에 담지 못했던 새로운 대중들이 그사이에 출현했을 수도 있고, 새로이 인지하게 된 생태계의 위기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 내세우는 해법이 더 오랜 시간을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들에게도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결국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과거로의 회귀만도 아니고, 완전한 새로움일 수만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래된 것에서 새로움을 보고, 새로운 것에서 시간의 무게를 느끼는 현실 인식이다. 새해라고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도, 신비한 역사의 힘이 저절로 정의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라면, 희망이든 복이든 지금-여기에서 공들여 짓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백영경 방송통신대 교수·문화인류학
(한겨레, 201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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