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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도마-거룩한 희생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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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4-02-03 16:33 조회17,0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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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 가운데 인간이 취하는 가장 이상한 포즈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혹시 식사를 하기 위해 요리를 하는 인간 모습, 그중에서도 칼을 손에 쥐고서 무언가를 썰고 자르는 그 모습은 아닐까. 칼자루를 쥔 손 앞에 놓인 그 `무언가`는 살아 있었던 `생명`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인간은 나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거의 단 하루도 빼지 않고 도마에 무언가를 올려 놓는다. 칼을 쥔 손, 매일매일 요리의 순간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낯설다.

`도마`라는 사물은 칼과 `재료`의 몸이 맞부딪치는 물리적 장이며, `무언가`(재료) 관점에서 보면 몸의 분할이 이루어지는 경계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물은 시간의 경사면이다. 영화 `제8요일`에는 `풀은 자를 때 운다`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 속 대사처럼 제 몸에 칼이 들어가는 순간 도마에 놓인 그것도 울었을 것이다. 생선 몸뚱이 내부를 가르고 들어갈 때, 살과 내장이 발릴 때, 도마 위로 피를 토해 놓는다. 파와 양파를 자르고, 마늘을 으깨고 다질 때, 그것들은 제 안의 완강한 핵심을 냄새를 통해 도마 위로 내어놓는다.

나무 도마에는 냄새의 형태로, 칼집의 흔적으로 그 위에 올라왔던 것들의 냄새가 밴다. 그 위에서 다른 것들을 자르기 전까지 냄새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양식으로 삼기 위해 다양한 몸을 가르고 들어간 칼집의 흔적은 이후에도 도마의 몸에 새겨져 기억된다. 사라진 것들이 무존재가 아니라 `존재`였던 까닭이다.


종교들 기도문에는 `거룩한 양식`에 대한 묵상이 나온다. 그 기도문을 신에 대한 감사문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 중심적 관점일 뿐만 아니라 `신`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만상의 신일 것이다. 신이 보기에는 인간만큼이나 만유의 생명도 귀한 `존재`일 것이다.

 
 산 것들은 본래 사람의 양식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도마에 밴 냄새와 칼집의 흔적은 인간의 일용할 양식이 한 존재의 죽음을 통해 다른 존재를 살리는 `희생제의`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모든 희생은 거룩하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매일경제 2014.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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