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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이쾌대, 유갑봉, 이여성과 광복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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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5-09-07 01:06 조회32,3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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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더위를 보기 드문 그림 전시회로 잊을 수 있었다.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이다. 미처 못 본 독자는 꼭 들러보시길 권한다.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 나처럼 문외한이더라도 이쾌대(1913~1965)의 회고전은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에게서 보지 못한 세계를 만나게 된다.

우리 현대화가들의 탁월한 작품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미진함이 없지 않았다. 우리 현대사의 격동 가운데 견디기 힘든 상처를 받기도 했던 이 예술가들이 왜 우리 역사의 진실, 즉 해방의 환희, 분단의 고뇌와 아픔을 더 크고 역동적인 구도 속에 담아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런데 이쾌대에게는 해방 직후의 현실과 정면 대결하는 예술적 고투, 현역작가인 신학철의 한국 현대사 연작을 연상시키는 힘찬 꿈틀거림이 있다.

책의 삽화로만 접했던 ‘군상’ 연작을 대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움직이기 어려웠다. 의미심장하게도 모두 분단고착의 해인 1948년에 그린 작품들은 큰 화폭에 많은 인물을 담고 있다. 인물들의 역동적인 몸과 자세는 기쁨, 기대와 결의를 뿜어내는 반면, 표정은 불안과 망설임, 좌절과 절망, 분노와 공포를 드러낸다. ‘걸인’, ‘자화상’, 작가 부부를 그린 ‘2인 초상’과 누드화들도 관람객을 사로잡는다. 서양화의 전통을 소화하여 자기 스타일을 완성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개성 넘치는 필치가 남다른 현실감각, 역사감각과 함께 살아 숨쉰다.

경북 칠곡의 유복한 집안 출신인 이쾌대는 12살 위의 형 이여성(1901~?)의 영향으로 민족현실에 눈을 떴다. 형은 좌파 독립운동가로서 3년간 투옥되는가 하면 자신도 그림을 그리며 복식사 등 조선 미술에 대한 연구 성과를 남겼다. 이쾌대가 해방 후 좌익의 조선미술동맹을 탈퇴했다는 설명 앞에 ‘월북작가’라는 낙인을 벗어나려는 사실 왜곡은 아닐까 잠깐 의심했다. 그러나 전시되어 있는 ‘북조선미술계보고’라는 1947년 글의 비판적 어조는 의혹을 씻어주기 충분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회화 전통과 서양화를 접목하여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는 부단한 실험이 특정 노선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정신을 입증한다.

한국전쟁 전후의 그의 삶에는 풀어야 할 공백이 많다. 그는 전쟁이 터지자 피란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인민군의 선전활동에 협력했고, 인민군과 함께 퇴각하다가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후 포로교환 때 가족이 있는 남이 아닌 북을 택했다. 왜 그는 인민군으로 분류되어 포로수용소에 갇혔을까? 미군 수용소장의 배려로 수용소 풍경을 그릴 정도였는데, 강요에 의한 부역임을 주장하며 풀려날 길이 정녕 없었던가?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떠날 만큼 남을 택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정도로 사정이 절박했던가? 형 이여성은 전쟁 전에 월북하여 1957년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것을 마지막으로 숙청되었으며, 작가도 1965년에 5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궁금한 것을 묻기조차 주저되는 아픈 기록들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식민지 시절부터 전쟁 전까지의 작품과 각종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있음에 놀라게 된다. 아내 유갑봉(1914~1980)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수십년간 잘 숨겨 보관해온 덕분이다. 전시장에 가득한 아내를 모델로 한 그림과 스케치 앞에서 작가가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다는 전기적 설명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지난주 고조되던 휴전선의 군사적 긴장이 직접 대화로 일단 가라앉았다. 참 다행이지만, 무척 씁쓸하다. 남북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은 양쪽 집권층에게 나쁘지 않다는 현실, 그 적대적 공생관계의 냄새가 구리다. 광복 70주년을 기리는 여러 행사가 빛이 바래는 느낌마저 든다.(후략)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경향신문, 2015년 8월 27일)
 
기사 전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272047095&code=99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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