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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정치권도 정파적 이익 못 벗어나면 ‘촛불 에너지’ 못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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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2-12 16:47 조회32,1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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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 반 동안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사태가 전개됐다. 최순실씨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PC가 국정 개입의 확실한 증거로 보도되면서 시작된 촛불시위는 지난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결의안이 통과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를 국민과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하는 것에 토를 달 사람은 많지 않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트르의 브뤼메르 18일』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나폴레옹 3세가 삼촌인 나폴레옹 1세를 본떠 황제로 즉위했다가 결국 혁명세력에 밀려 퇴위한 것을 헤겔의 표현을 끌어와 논평한 것이다.


이처럼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비극의 비장미를 느끼게 했지만,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종착지는 희극적 요소들로 가득하다. 마르크스가 두 나폴레옹을 비교하려고 이 비유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근대국가들로서는 자기네들 나라에서 비극을 경험한 구체제가 독일의 유령으로서 희극적 역할을 연기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교훈적이다”라는 마르크스의 다른 서술에 잘 나타난다.


즉 근대가 시작될 때 구체제가 자신의 정당성을 끝까지 주장하며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들은 비극적이지만,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판명된 구체제가 다시 뒤늦게 출현한 것은 희극적이라는 의미다. 마르크스는 낡은 체제가 물러나는 과정에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것은 “인류가 자신의 과거와 즐겁게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라는 냉소적이면서도 낙관적인 말을 덧붙였다.

 
[박근혜 정부 조롱의 대상으로만 남을 듯]


실제로 박정희 통치 18년과 그 최후 국면인 유신독재는 정치적 정당성이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었지만 당시 한국 사회, 특히 경제 발전의 요구와 조응하는 면이 없지는 않았다. 유신체제가 공식적으로는 종결됐지만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경제발전 모델을 유산으로 남겨놓았다. 따라서 구체제로서의 유신체제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려고 했고, 그 붕괴 과정은 격렬한 저항과 충돌을 동반했다.


반면 박근혜 정부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비극적 탄식의 대상조차 되기 어렵다. 그보다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근혜 정부의 통치방식은 우리 사회의 변화된 상식과 규범에 너무나 어긋나고, 또 경제적으로도 이미 시대에 뒤떨어지는 모델을 우스꽝스럽게 복원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촛불시위의 문화적·축제적 양상도 이런 면이 반영된 것이다.


그렇다고 촛불시위에 정치적 의미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문화적 형식을 통해 정치적 의지가 훨씬 더 세련되고 풍부하게 표현됐다. 100만 명 이상이 모이는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됐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적인 일이었다. 더 중요한 점은 평화적 모습 이면에 작동하고 있었던 정치적 역동성이다. 촛불시위는 마치 생물처럼 정부·여당·야당 등 모든 제도권 내 정치주체들의 행위에 적절하게 응답하고, 또 응징하며 사태를 주도했다.


이렇게 보면 광장의 모든 행위들은 새롭게 해석된다. 정부와 여당 내에서는 촛불시위 초기에 바람이 불면 꺼질 것이라는 식으로 촛불시위를 지나가는 일로 만들려고 했다. 이에 바로 LED 촛불, 횃불 등의 창조적 수단으로 대응한 것은 위대한 정치풍자였다. 그리고 사태가 긴박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참여자의 수가 점증했던 것은 단순한 촛불시위의 대의에 동참한다는 것을 넘어 반성이 없는 정부여당은 물론이고 동요하던 야당들을 엄중히 경고하는 집단적 의지의 표명이었다. 특히 국회에서 탄핵의결 일정이 정해진 직후 진행된 12월 3일 촛불시위에 유례없이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은 정치권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다.


광장에서의 평화적 시위도 우발적 사고와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광장의 정치를 정치적 혼란과 등치시키면서 미봉책으로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는 모든 언설들에 맞서는 몸짓이었다. 촛불시위는 단순히 억압과 그에 대한 즉자적 저항이 아니었다. 긴박하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그때그때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가장 바른 길을 찾는 과정이었다. 지휘자가 없이 완벽한 화음을 만들어낸 오케스트라와 같았다. 그러니 이번 촛불시위를 위대한 정치혁명이라고 칭송하는 것이 조금도 과하지 않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혁명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개념이었다. 혁명은 어느덧 정치보다는 기술혁명, 디자인혁명 등 기술적 측면이나 상품성에 더 관계가 깊은 용어가 됐다. 이번에 촛불이 혁명으로 명명되며 갑작스럽게 정치혁명이라는 용어의 복권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촛불시위는 조직된 힘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단기간에 사회경제체제를 개조한다는 식의 관습적인 정치혁명 개념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촛불혁명의 위대함은 그 수행성에 있다. 촛불시위는 어떤 주장이나 이념을 진리로 전제하거나 당장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각성하면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새로운 형태의 혁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적 외양과 혁명적 변화가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위대한”이라는 수사에 도취해서는 안 되며 이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위대함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건이나 인물 이면에 들춰내기 부끄러운 모습들도 적지 않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소설이자 영화로도 여러 번 제작된 바 있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는 거꾸로 겉으로는 추악해 보이는 행태들 속에 어떤 위대함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촛불이 밝혔던 꿈과 열망은 안 꺼질 것]


위대함은 근본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틀 속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 불가능함에 도전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런 만큼 상식을 벗어나기도 하고,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나아가 반감을 일으키는 면도 같이 갖는다. 촛불시위는 두 달 전만 해도 생각하기 어렵던 일을 현실로 만들면서 우리 자신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이제 촛불시위가 새 국면에 접어들면서 위대함의 이면의 불편한 모습들이 표면에 드러날 수 있다.


모두 쉽게 동의했던 단일한 목표가 사라지면서 수면 아래에 있던 다양한 목소리와 주장들이 서로 충돌하는 일이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마음으로 공적인 대의에 헌신하는 아름답고 위대한 행진에 참여했던 이들이 갑자기 세속적 이해관계에 몰두하는 인상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라는 회의적 반응이 이에 따를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여전히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고, 그 판결 이후 전개되는 사태가 한국 사회를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될지도 불분명하다. 남북 관계부터 경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어느 하나 간단치 않다. ‘과거와 즐겁게 결별하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없다. 정치권이 지혜롭게 이 문제들을 해결해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우려가 크다.


보수적 정치세력은 반대세력을 종북으로 모는 방식으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확보하는 방식에 너무 중독되어 있었다. 그것이 최순실 게이트를 만들었다. 이러한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또 다른 촛불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야당들도 국민의 뒤를 좇기 바빴고 여전히 이 사태를 정파적 이익을 강화하는 데 활용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자신을 버리는 태도로 임하지 않는다면 이들도 촛불의 거대한 에너지를 받아들이기는 어렵다.(후략)



이남주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중앙선데이, 2016년 12월 11일)


기사 전문 http://sunday.joins.com/archives/1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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