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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호모 로컬리스와 지방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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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2-19 17:06 조회36,2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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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특정 지역에 생활 본거지를 둔 존재, 즉 호모 로컬리스다. 국민국가 체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국가에 소속된 지위로서의 시티즌십 사상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시티즌십이 정치적이고 인위적인 기획의 산물이라면, 호모 로컬리스는 실생활과 밀착된 자연발생적 개념이다.

인권에 기반을 둔 지방분권 모델이 주목받는다. 국가 차원에서 인정되는 보편 인권기준을 모든 지방정부에서 실천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므로 전국 차원의 형평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개념적 안전장치가 마련되는 큰 장점이 있다. 

 

독일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이 나라에서 교사가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학생들이 금방 답을 못하고 서로 물어보는 게 아닌가. 주마다 교육자 양성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방제나 지방분권 국가에선 당연한 일이 한국인에겐 이렇게 낯설다. 요즘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흔히 개헌의 3대 쟁점으로 기본권, 지방분권, 정부 형태(권력구조)를 들곤 한다. 하지만 지방분권은 인권과 동일한 선상에서 취급해야 하는 주제다.

 

인류가 수렵채취에서 농경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한 이래 인간은 자기가 속한 생활권의 범위 안에서 사회적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특정 지역에 생활 본거지를 둔 존재, 즉 호모 로컬리스다. 국민국가 체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으면서 국가에 소속된 지위로서의 시티즌십 사상이 나오긴 했다. 하지만 시티즌십이 정치적이고 인위적인 기획의 산물이라면, 호모 로컬리스는 실생활과 밀착된 자연발생적 개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지역’이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혼재되어 있어 혼동을 일으킨다. 국가(중앙) 차원이 아닌 로컬이라는 의미와, 서울이 아닌 지방이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중앙이냐 로컬이냐 하는 구분에 따르면 서울에 살아도 로컬 주민이고 우도에 살아도 로컬 주민이다. 지방분권은 주로 이 점을 겨냥한다. 로컬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로컬로 이양하고, 중앙정부는 나머지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탈중앙화’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방분권 개헌은 탈중앙화 개헌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반면, 서울 한 곳에 자원, 인프라, 영향력이 몰려 있는 것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주장은 ‘탈집중화’로 설명할 수 있다. 탈집중화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원의 분산을 뜻한다. 한국은 중앙화와 집중화가 모두 극심한, 예외적인 나라다. 지방이 서울에 대해 극심한 박탈감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방분권이 왜 필요한가. 지방분권의 궁극적 목적은 호모 로컬리스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 삶의 문제를 잘 해결하기 위해서다. 호모 로컬리스가 사회적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최소한의 의식주, 생계, 건강, 의료, 환경, 교육, 노동, 사회보장, 불차별, 준법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곧 인권이다. 따라서 지방정부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에 해당하는 인권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규정할 수 있다. 초대 유엔 인권위원장을 지내고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을 주도했던 엘리너 루스벨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권은 우리가 사는 주변, 작은 곳에서부터 지켜져야 한다.”

지방자치를 하지 않던 시절엔 중앙정부가 도지사를 직접 임명했다. 주로 지역 연고가 있는 내무부 소속 고위 공무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곤 했다. 도지사는 임명제청권자인 내무부 장관, 그리고 임명권자인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졌다. 전형적인 상향 책무성 제도였다. 언론엔 누가 ‘도백’이 됐다더라 운운하는 전근대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주민들에게 책임질 의무가 없는 사람이 지방정부의 우두머리였으니 그것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상황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지방자치는 지방정부의 수장이 주민들에게 직접 책임을 지는 제도이니 이것이 내재적으로 얼마나 민주주의에 가까운지 알 수 있다.

지방분권을 실현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 접근이 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탈중앙화 방안이다. 통상적으로 이것을 지방분권이라 한다. 주민에 대한 하향 책무성이 강화되고 수요 중심의 행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탈중앙화는 지방분권의 출발점에 불과하며, 잘못 시행될 때 부작용이 크다. 우선, 지방정부들 사이에 칸막이가 쳐지면서 중앙정부가 지역 간 형평을 달성하기 위해 전국 단위의 정책을 펼 수 없게 될 위험이 다분하다. 잘사는 지역이 못사는 지역을 돕는 연대성의 원리가 헌법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근거다.

탈중앙화를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민참여와 인권이 실현되지도 않는다. 이 문제의 전문가인 김중섭 교수는 <인권의 지역화>에서 지역공동체의 고유한 질서와 집단주의적 속성이 반인권적일 수가 있고, 그것이 새로운 인권규범을 수용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지적한다. 토박이들의 동질성 의식 때문에 외지 출신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굴러온 돌’ 취급을 받기 일쑤다. 또한 무슨 가문이네, 학교네 하면서 지역 유지들끼리 배타적 카르텔을 유지하면 평등을 강조하는 인권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둘째, 주민참여를 통해 지방분권을 실천하는 방안이 있다. 이때 지역 시민사회가 참여형 거버넌스를 통해 부문별로 특수한 욕구를 행정에 반영할 수 있고, 각종 위원회를 통해 제도적 형태로 행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것처럼 시민사회의 제도적 참여가 요식행위로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지방분권형 주민참여 역시 전국 차원의 수평적 형평을 보장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방안, 즉 인권에 기반을 둔 지방분권 모델이 주목받는다. 국가 차원에서 인정되는 보편 인권기준을 모든 지방정부에서 실천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므로 전국 차원의 형평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개념적 안전장치가 마련되는 큰 장점이 있다. 그런데 연구에 따르면 인권에 기반을 둔 접근을 할 때 고정된 법적 권리들을 항목별로 실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긴 하나 길게 보면 효과가 적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점은 지역 시민단체나 인권운동이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오히려 지방정부의 의사결정과 행정 속에 인권의 팬더(PANTHER)원칙―참여, 책무성, 불차별, 투명성, 인간존엄, 권한 강화, 법의 지배―이 녹아들도록 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지방분권의 방향이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유엔 인권이사회가 지방분권과 인권에 관해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지방분권의 헌법적 보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누누이 강조한다. “국가의 헌법에서 지방정부를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헌법상의 보장이 지방분권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있어 최선의 방안이다.” 요즘 회자되는 지방분권형 개헌 논의가 명백하게 옳은 방향임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것에 더해 보고서는 국가가 비준한 국제인권법의 내용을 지방정부가 풀뿌리 차원에서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일깨운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의 출마자는 주민인권 보호에 특별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 중앙 차원이든 지방 차원이든 인권에 대한 신념이 없는 사람이라면 공직에 출마하지 않는 게 옳다고 본다. ‘갈등 전문가’라는 오명을 얻었던 서울 강남구청장의 사례는 반면교사가 된다. 충남도의회가 인권조례를 폐지한 것도 지방자치 정신을 스스로 부정한 경우에 해당된다.


끝으로, 21세기 미래지향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지방분권이 되려면 금과옥조로 여겨져 온 개발모델을 지역 차원에서 답습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묻지마식 개발 패러다임으로 지방분권을 시행한 것이 어떤 암울한 결과를 낳았는지 알고 싶으면 중소도시 외곽에 세워진 텅 빈 아파트 단지들을 보면 된다. 개발의 명분으로 승인권자와 건설업자들이 결탁하여 지역사회를 망쳐 놓는 작태를 지방분권의 이름으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외형적인 성장과 토건식 개발에 목말라하는 풍토, 개발의 명분 앞에서는 그 어떤 가치도 맥을 못 추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선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의 거시적 틀 안에서 지방분권을 작동시킬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8년 2월 13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2149.html#csidx3a1a1aa62cbbc9a8ec66356c0b3ec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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