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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제] 한국 인권 어디까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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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8-04-17 09:59 조회37,7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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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이면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돌을 맞는다. 세부적으로 보면 촛불의 염원에 못 미치는 점들이 적지 않지만, 큰 틀에서 보면 전 사회에 자유와 인권의 기운이 분명 늘어났다. 그런데 체감 분위기를 넘어 구체적으로 얼마나 좋아졌는가 하는 점은 인권을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일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 단서를 제공하는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세계 각국의 인권 상황을 일정한 기준으로 비교하는 지표들이 여러 가지 있다. 이런 연구들은 통상 1년 단위로 조사가 이루어지는데 2017년 상황을 평가한 조사들이 요즘 속속 나오고 있다. 그중 ‘법의 지배 지표’라는 조사가 있다. 세계정의프로젝트(WJP)라는 국제 연구기관이 거의 십년째 매년 내놓는 중요한 지표다. 여기에서 평가한 2017년 한국의 법의 지배 상황이 그 전해에 비해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 질문은 ‘새 정부가 인권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는가’라는 평가와 직결되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2016년에 비해 2017년 들어 지표가 약간 호전되기 시작했다.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장기 추세를 추적해온 단체의 연구이니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조사 기간인 2017년의 전반부는 새 정부의 성과와 직접 관련이 없다. 따라서 본격적인 지표 변화는 내년 조사에서부터 반영될 것이다. 어쨌든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건 사실이다. 연구 결과를 소개하기 전에 우선 법의 지배 지표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세계정의프로젝트는 법의 지배 개념을 네 가지 보편적 원칙이 통용되는 체제로 규정한다. 정부와 개인이 법 앞에 책임을 지는 법적 책무성이 있어야 한다. 기본권이 보장되는 명확하고 공정한 법률이 있어야 한다. 법률을 제정·집행하는 과정에서 공평하고 접근성 높고 효율적인 열린 정부가 있어야 한다. 불편부당한 분쟁 처리 체계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법의 지배 지표가 인권 수준을 알아보는 데 있어 왜 중요한가. 인권의 구체적인 침해상황을 조사하는 연구와는 달리 인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 조건의 수준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 지표는 구체적으로 8개 대주제와 44개의 소주제를 선정해 전세계 113개국을 조사한다. 나라마다 대표적인 세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 1천명의 평가, 그리고 그 나라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합쳐 최고 1점, 최저 0점으로 각 나라의 점수를 매긴다. 총점의 순위와 주제별 순위를 모두 알 수 있다. 총점으로 1위는 덴마크(0.89), 113위는 베네수엘라(0.29)로 나왔다. 한국은 총점 0.72로 20위였다. 전체 결과만큼이나 주제별 평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여덟 가지 대주제 중 전세계 기준에 비추어 한국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점수를 받은 주제는 규제조치의 집행성, 민사법과 형사법 영역이었다. 상대적으로 점수가 낮게 나온 주제는 정부권력 제한, 부정부패 해소, 정부 개방성, 기본권, 질서와 치안이었다. 이 중 정부 개방성을 빼고 나머지는 모두 2017년 들어 그 전해보다 개선된 결과를 보인다. 특히 정부권력 제한은 27위에서 26위로, 부정부패 해소는 35위에서 30위로, 기본권은 32위에서 29위로 올랐다.

소주제의 평가를 따져보면 법의 지배 중에서 강점과 약점 부분이 드러난다. ①정부권력 제한을 다룬 대주제 내에서 최고점은 권력의 합법적 이양, 최저점은 사법부에 의한 권력통제가 받았다. 한국의 사법부는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그런 수준의 기관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②부정부패 해소 중 최고점은 사법부, 최저점은 입법부가 받았다. ③정부 개방성 중 최고점은 정보 접근권, 최저점은 시민 참여로 나왔다. 아직도 국정의 시민 참여가 피상적이라는 뜻이다. ④기본권 중 최고점은 생명권과 안전권이 개선된 것으로 나왔고, 최저점은 노동권이었다.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한국의 노동 현실이 또다시 입증된 것이다.

⑤질서 및 치안 주제에서 최고점은 내전이 없다는 사실, 최저점은 폭력범죄 피해자의 구제로 나왔다. ⑥규제조치의 집행성 중 최고점은 신속한 처리로, 최저점은 효과적 이행성으로 나왔다. ⑦민사법 영역의 최고점은 법정이 아닌 제3자에 의한 대안적 분쟁 해결로, 최저점은 비용감당 어려움으로 나왔다. ⑧형사법 영역의 최고점은 적법절차와 신속한 판결, 최저점은 효과적 수사로 나왔다. 경찰과 검찰이 밥그릇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그들의 존립 목적이나 다름없는 수사 항목에서 꼴찌가 나온 점을 어떻게 해명할지 궁금하다.

이번 결과와 한국의 예외적 성격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우리보다 순위가 높은 나라 중 홍콩을 제외하고 식민지배의 경험이 있는 곳은 한국뿐이다. 전쟁의 위협이 있는 유일한 나라, 유엔 가입이 가장 늦은 나라라는 특징도 있다. 흥미롭게도 삶의 질과 사회권으로 봐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니, 우리의 위치가 세계 속에서 어디쯤인지 객관적으로 드러난다. 법의 지배든 삶의 질이든, 한국은 상중하로 따져 세계적으로 ‘상’에 속하지만, 상급 국가들 내에서 수우미양가로 따지면 양 또는 가에 불과하다. 더 올라가야 하는 건 분명한데 어떻게 하면 올라갈 수 있을까. 여기서 인권운동이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단순히 개별적 인권침해 사안의 해결 또는 제도 개선만으로는 부족하다. 근본적 차원에서 사회 전체의 가치관이 변해야 한다.

한국의 사례는 독재와 강압을 극복하고 이룰 수 있는 성과의 최대치와 한계를, 그리고 우리의 인권 수준 역시 이 점과 내재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특수한 조건 아래서 국민을 몰아붙이면 단기간에 덩치와 형식적 제도는 상당히 키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내적 수준은 그런 식으로 높이지 못한다. 압축성장은 가능해도 압축성숙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가치관의 왜곡으로 인해 성장론이 성숙론을 비웃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조차 모른다는 점이다. 이것을 혁파하지 않으면 법도 재벌한텐 물러지고, 더 이상의 인권 개선도 돈과 개발논리의 벽을 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 전체의 암묵적 분위기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도 촛불혁명을 통해 근본적 변화 가능성이 보인 것은 다행이다. 탄핵과 정권 교체만 해도 작은 일이 아닌데 노동과 복지와 휴식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지 않은가. 미투운동 역시 촛불에 의해 정치적 기회의 공간이 열린 후 사회적 의미에서의 기회의 창이 열린 경우다. 촛불혁명을 겪으면서 자기표현의 힘을 자각한 여성들 사이에 형성된 어떤 감응성의 총체가 젠더 불평등이라는 오래된 모순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유의 혁명적 감전현상과 인권의식의 고양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체질을 바꾸고, 한반도 전체 차원에서의 변화를 이끌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2015년 아일랜드에서 동성 간 결혼 합법화 조처에 크게 고무된 측이 누구였는지 아는가. 북아일랜드 평화프로세스 찬성파였다. 아일랜드 국민의 성의식 변화라는 변수가 평화를 결정하는 정치협상에서도 개방되고 실용적인 태도로 표현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었다. (후략)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2018년 4월 10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9988.html#csidxfa42a625b76a8719fb85b51f886cc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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