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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 '우리집'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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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9-09-16 10:18 조회17,6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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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강두식·박병덕 옮김, 바다출판사)은 접촉 공포의 전도(顚倒)에서 군중의 본질을 끌어내며 논의를 시작한다. 군중 속에서 서로 밀고 밀리며 밀착될 때 사라지는 것은 사람 사이의 간격인데, 이때 그 간격이 사회적 위계, 계급, 차이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이 카네티의 특별한 통찰인 것 같다. ‘방전’(放電, Entladung)이라는 해방과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군중은 서로 간의 차이가 제거된다고 믿는다. 낯선 존재와의 접촉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포함해서 인간이 자신의 계급과 신분,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간격의 유지에 얼마나 골몰하는지 생각해보면 이건 정녕 아이러니한 일이다. 카네티의 설명은 그 간격이 구속이고 질곡이며,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몸과 몸이 밀고 밀리는, 틈이라곤 거의 없는 밀집 상태 속에서 각 구성원은 상대를 자기 자신만큼이나 가깝게 느끼게 되며, 결국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도 남보다 위대할 것도 나을 것도 없는, 이 축복의 순간을 맛보기 위해 인간은 군중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카네티에 더 기대지 않더라도 이러한 방전의 순간이 환상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다. 잠시 폭발적으로 누렸던 평등의 느낌과는 달리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평등하지 않다. 군중은 와해되며, 우리는 결국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문을 닫아걸고 잠자리에 눕는다. 아무도 자신의 소유물, 자신의 사회적 신원을 버리지 않으며 가족을 이탈하지도 않는다. 카네티의 논의는 이제 겨우 시작이고 그의 군중론과 권력론은 한층 더 복잡한 국면을 거쳐가게 되지만, 지금 내 관심은 그렇게 군중이 돌아가는 각자의 집을 향해 있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은 어쨌든 접촉 공포의 상대적인 예외지대이며 자발적 구속은 없지 않으나 친밀감과 안전감이 대가로 주어지는 공간이다. 양차대전과 히틀러의 시대라는 특별한 역사적 실존적 근심에 밀착해 있는 카네티의 ‘군중론’은 기실 건전한 스포츠의 영역이나 민주적 시민 정치의 제대로 된 활성화 같은 데서 극단을 완화하는 안전지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럴 때도 집은 광장의 들뜬 시간이 안정화되고 새롭게 의미화되는 근거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집이 지금 존재하는가. 며칠 전 윤가은 감독의 영화 <우리집>(2019)을 보고 나오면서 머릿속을 맴돈 질문이다.

 

영화는 부부간 언쟁이 차가운 쇳소리로 울려 나오는 좁은 아파트 거실에서 시작해 그 거실의 식탁에 초등학교 5학년인 딸 하나가 차린 음식을 놓고 모여 앉은 네 가족의 무거운 숨소리와 함께 끝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전까지 식탁에 식사가 제대로 차려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맞벌이 부부의 갈등은 돌이키기 힘든 지경인 듯하다. 중학생인 하나의 오빠 찬은 아빠 엄마에 대한 기대가 없어 보이는데, 하나는 어떻게든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은 가족 여행의 단란한 시간을 회복해보려 한다. 감독이 실내 장면의 프레임을 좁게 잡아내고 인물들의 호흡을 가까이 느끼게 만들면서 하나의 집의 어수선하고 불안한 공기는 좀 더 직접적으로 힘들게 감각된다. 그리고 하나가 동네에서 알게 된 유미(10살), 유진(7살) 자매와 어울리며 또 하나의 가족 이야기가 등장한다. 도배 일을 하는 유미네 부모는 지금 남쪽 바닷가의 호텔 공사 현장에 장기간 가 있어 어린 유미가 동생을 보살피며 집을 지키고 있다.

 

두 집 모두 위태롭기 그지없는데, 영화는 무너져내리는 집을 지키려는 아이들의 분투를 섬세하고 정직한 눈으로 따라가며 우리 시대 가족 현실에 대한 가슴 아픈 실감을 자아낸다. 영화에서 어른들의 자리가 지워지고 아이들의 이야기가 이상한 활력 속에서 전경화될 때 결국 우리가 묻게 되는 것은 남아 있는 희망의 분량, 시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유미네 부모를 찾아 나선 여행길에서 아이들이 서로를 상처 내는 말을 쏟아내며 자신들의 소중한 마음이 담긴 ‘그것’을 내던지고 짓밟아버릴 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금세 지워지고 사라져갈 저 아이들의 시간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영화의 마지막, 암전되는 화면 위로 들려오는 식탁 위의 무거운 숨소리는 우리의 것이 된다. 그 숨소리의 자리에 ‘하나’가 포기하지 않은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을까. 경제적 계급 격차는 고정되거나 심화되는 가운데 ‘가족과 집’을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커다란 사회적 변동과 이데올로기적 해체 과정은 당장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아픔들을 강요하며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어 ‘우리 집’에 담긴 특별한 뉘앙스는 이제 얼마간 화석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한겨레신문 2019년 9월 3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8296.html#csidx0d3121c3448892db7e1fe1edfd13ddb onebyone.gif?action_id=0d3121c3448892db7e1fe1edfd13d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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